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
정세랑 외 지음 / 창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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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그거 아세요. 처음 만나 밥을 먹을 때 호칭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물어봤잖아요. 그냥 언니라고 해요. 해서 그렇게 부를까 하다가 반감이 들었어요. 다른 직원들은 있지도 않은 직급을 만들어서 성 뒤에 붙여 부르는데 왜 당신만 언니라고 불러야 할까. 얼마 동안은 언니라고 부르다가 다른 직원들에게 하는 것처럼 직급을 붙여 불러요, 이제는.


정세랑 작가의 말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책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를 먼저 읽었더라면 당신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게 괜찮을지도 몰랐겠어요. 그랬다면 지금 언니, 언니라고 부르며 좀 더 친해졌을지도 모를 일이겠지요. 아시죠. 직장에서의 관계란 일시적이고 사나울 수밖에 없다는 걸.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웃긴 글을 봤어요. 직장에서의 정신 승리법. 9시에서 6시까지 힘든 약속 있다고 생각하며 가기. 컴활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가기.


직장에 관한 유머를 읽어도 좀처럼 좋아지질 않아요. 나는 감정이 없다. 이 사람과는 저녁 6시 이후에 볼 일이 없다. 되뇌어도 화나고 억울한 마음은 사라지질 않아요. 언니는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나요. 직접 물어보고 싶지만 하진 않을래요. 질문을 던진다고 해도 우리 사이에는 진솔한 이야기가 오고 갈 시간도 여유도 없으니까요.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를 일주일 내내 읽었어요. 언니의 나라에서도 행운의 편지라는 게 있었나요. 어느 날 문틈에 끼인 하얀 편지 봉투를 발견했어요. 누가 나에게 편지를 보냈을까. 두근거리며 봉투를 열었을 때. 손글씨로 쓰인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 년에 한 바퀴를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은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 4일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이 편지를 포함해서 7통을 행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 주셔야 합니다. 복사를 해도 좋습니다. 혹 미신이라 하실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라는 문장을 읽자마자 던져 버렸어요.


행운은커녕 짜증만 나는 편지였어요. 행운이라는 게 운이라는 게 7통의 편지만 써서 받을 수 있다면 7통이 문제겠어요. 앉은 자리에서 70통이라도 쓸 수 있겠지요. 장난과 익살이 담긴 한때의 유행 같은 거였어요. 요즘에도 행운의 편지를 쓰는지. 편지를 받고 고민에 빠지며 7통의 편지를 쓰고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주고 싶어요. 그만큼 절박하고 외로운 이일 테니까요. 정세랑 작가는 언니들의 연대 안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몇 백 년 전에 살았던 언니들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곳에 남아서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다고. 언니들의 미약한 힘이 모여 용기와 온기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건네주고 있다는.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에는 언니가 언니를 응원하고 지지해 주는 글로 가득해요. 여기에서 말하는 언니의 성별은 전부 여자예요. 책을 읽으면서 만약에 이런 형식의 글을 쓴다면 누구를 호출할까 생각해 보았어요.


여자만 언니가 될 수 있을까. 아니에요. 채만식의 소설 「이상한 선생님」에는 성별이 다른 형제를 언니라고 부르는 대목이 나와요. 그러니까 남자인 동생이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않고 언니라고 부르지요. 광복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주인공이 남자 형을 대석 언니라고 불러요. 언니라는 호칭은 여성과 남성의 구별이 없는 거라는 걸 알게 되면서 다양한 언니들을 부를 수 있구나 즐거웠어요.


창비에서 이걸 알았다면 언니, 오빠, 형 할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쓴 편지를 책으로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해요. 저는 좀 무식해서 논쟁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없어요. 싸우고 분노하는 일에 소질이 없어요. 감정을 숨길 줄 만 알았지 드러내는 법을 배우질 못했어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상대가 날 싫어하지 않을까는 걱정으로 의견을 내는 걸 극단적으로 두려워해요. 남녀 구별하지 않고 인간으로 서로를 바라보면 어떨까요. 이런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으로 버텨요.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를 읽는 순간에는 온갖 상념이 떠올라서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이걸 써야지 했어요. 막상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니. 휴. 한숨만 나오네요. 어두운 길을 걸어 올라와 집에 불을 밝히고 씻고 누웠을 때 언니들의 곁에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가 있었으면 해요. 짧은 에세이 형식이라 길어야 5분 정도 시간을 들이면 한 편씩 읽을 수 있어요. 오지은 님의 글이 유독 기억에 남았어요.


이상한 사람이 있으면 의심이 들면 자신에게 말하라고 하네요. 알지요. 말을 해도 해결이 되지 않는 일이 태반이라는걸. 그럼에도 말을 하면 나의 슬픔이 옅어질 수는 있어요. 나만이 나의 어려움을 알아선 안된다는 걸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해요. 쓰레기장을 청소하다가 책 몇 권을 가져왔어요. 아주 오래된 책 들인데요. 어렸을 때 읽었던 기억 때문에 그냥 놔둘 수가 없었어요.


먼지를 털고 물티슈에 소독약을 묻혀 닦았어요. 종결어미가 -읍니다로 끝나는 책. 쓰레기장에 앉아 문학이 무얼까 고민했어요. 책을 읽고 버리고 그걸 나 같은 사람이 주워가고. 문학은 책에만 학교에만 있다고 생각한 시절이 부끄러웠어요. 얼른얼른 배워서 작가가 되겠다는 쓰레기 같은 마음을 먹었던 시절까지도요. 문학이 아니면 안 되는 시간에서 문학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지금 여기까지. 도착했어요.


내가 말하지 못한 감정을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어요. 편지를 썼지만 부치지는 못할 듯해요. 우리에게 알 수 없는 행운이 찾아오기를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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