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동 이야기
조남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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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고 있는데 자꾸 뭐 하냐고 물어서 웃었다. 조남주의 연작 소설집 『서영동 이야기』에 실린 마지막 소설 「이상한 나라의 엘리」의 마지막 장면처럼. 재개발 지구에 집을 얻은 아영은 결국 집에서 나와야 했다. 아영이 학원에서 몰래 잠을 자다 원장에게 들키고 커다란 캐리어 가방을 끌고 지하철을 탄다. 스마트폰에서 마주한 기사를 보고 아영은 웃는다. 웃음이 나왔지만 웃기지는 않았는데.


속으로 말했다. 일하러 왔으니까 일하고 있지. 할 일 더럽게 없나 보네. 제발 관심 좀 꺼주삼. 「교양 있는 서울 시민 희진」은 몇 번의 이사를 하는 동안 챙긴 시세 차익으로 집을 마련한다. 희진은 '생각이야 참을 수 없지만 말을 가릴 줄 알거든요. 이게 현대인의 교양이죠.' 생각하며 부동산 사장님의 말에 할 말을 참는다. 쓸데없는 질문에 웃으며 속엣말을 하지 않은 건 현대인의 교양을 갖춘 자의 덕목이라니 나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남주의 『서영동 이야기』를 읽으면서.


1980년대에 원미동이 있었다면 2020년대는 서영동이 있지 않을까. 부동산 광풍, 영끌, 갭투자, 역세권 『서영동 이야기』에는 포털 뉴스 메인에 기사에서나 볼 수 있는 언어가 존재한다. 반영론적 관점으로 해석하자면 『서영동 이야기』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가지는 문제를 그대로 끌고 들어온다. 문학이 무슨 힘이 있을까 의문하는 자들에게 『서영동 이야기』는 위로가 된다. 여기 집 한 채를 갖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집 앞에 지하철이 들어오는 건 괜찮은데 요양병원은 안 된다고 시위하는 사람들. 비싼 값에 집을 팔기 위해 인터넷 카페에 선동 글을 올리는 사람. 양도세보다 증여세가 싸니까 집을 자식에게 주는 사람. 아이가 혼자 겉도는 것 같아 일부러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그곳에서 만난 엄마들과 자신은 다르다고 여기는 사람.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영어 스터디는 꼭 하는 사람. 『서영동 이야기』에는 악인이 없다. 살아봐서 알겠지만 우리 사는 세계는 드라마와 영화와는 다르다.


사건을 일으키고 분란을 만들어 다음 편 예고를 기다리게 만드는 인물이란 여기 이 세계에는 없다. 완전히 나쁜 놈도 완전히 착한 놈도 없는 여기. 『서영동 이야기』는 그런 세계를 그린다. 여러 채의 아파트를 가지고 있고 입주자 대표까지 하는 안승복 씨도 집에서는 딸의 말을 경청하는 다정한 아빠다. 젊은 나이에 집 걱정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 유정은 남편에게 묘한 자격지심을 느낀다. 원장과 학원연합회 회장을 겸하는 경화는 요양원 반대 시위를 벌이다 현타가 온다.


서영동은 실제 하는 곳이 아니다. 실제 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곳이 서영동이다. 경비 근무자에게 상한 과일을 골라 주고 집값이 올라갈 수만 있다면 몸싸움도 불사하지 않는다. 믿고 싶지 않지만 뉴스에 나와서 세상에 이런 일도 있네 하면서 본 사건들. 서영동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소설이 현실을 그리는 역할에 충실할수록 세상은 아주 느리게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다.


빚도 자산이라면서 교양 있는 서울 시민 희진은 대출을 받아 집을 산다. 남편은 그런 희진에게 고마워한다. 좋은 아내의 기준이 10억을 만들 수 있냐 없냐인 것 같아 남편의 고마움이 달갑지 않다.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인물과 꿈을 꿀 수 있는 권리라도 가지고 싶은 인물이 공존한다. 안승복 씨, 경화, 아영, 희진, 보미, 유정의 바람과 욕망이 이해가 간다. 원장 경화는 몰래 학원에서 잠을 자고 있는 아영을 돕고 싶어 한다. 도움을 주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줘야 할지는 모른 채.


그런 도움이라도 건넬 수 있다는 어른이 있으매 『서영동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안심하며 덮을 수 있었다. 서영동에서 살아가는 그들에게 내일이 아닌 오늘이 있었으면 한다. 내 앞길도 건사 못하는 주제에. 누가 누굴 걱정하고 있나 하지만. 조남주의 인물들에게는 대책 없는 응원을 해주고 싶다. 행복동, 원미동, 서영동까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키 작은 사람들이 우리 동네에 살고 있다. 어둠 속에 반짝이는 별들을 보면서 간절한 희망을 쏘아 올리는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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