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완견을 기르는 집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눈에 넣어도 예쁘지 않을 귀여운 강아지들을 보면 한번쯤 길러보고픈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소외' '삭막' '소통부재' 등의 단어가 화두가 되고있는 현대 사회에서, 개만큼 충직한 친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젊은 느티나무님의 알라딘 서재에서 몰래 퍼옴-
개를 기를 때 성대수술을 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단다. 아파트 같은 곳에서 시끄럽게 짖어대는 개의 존재는 이웃과의 분쟁을 불러오는 이유가 되니까. 짖지 못하는 개, 이게 과연 개일까? 짖는 게 거의 유일한 의사 표현인 개로서는 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슬프기 짝이 없을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대수술은 너무 잔인한 행위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개를 기르지 않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그럼 고환/불임수술은 어떨까. 물론 난 고환수술에 반대한다. 고환에서 분비되는 성호르몬은 개의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별로 과학적이지 못한 믿음을 갖고 있는 탓이다. 그 허황된 믿음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벤지, 개로서는 할아버지인 16세건만, 아직도 '정정하다'는 말을 듣고 산다. 이 나이에도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내 팔에 대고 자위행위를 하고, 분비물을 배출한다. 처음에야 그게 귀찮았지만, 내 팔을 희생시켜 벤지가 건강하다면, 하는 마음으로 과히 아름답지 못한 장면들을 참아냈다. 지금은 거기에 매우 익숙해져, 벤지가 그짓을 하는 동안 난 한가롭게 독서를 하거나 TV를 본다.
벤지가 남자인 데 반해, 암컷의 경우는 좀 더 심각한 모양이다. 요즘 읽는 <독신>이란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육개월에 한번씩 생리가 있고나면 한 삼주나 사주쯤이 발정기야. 그때 밖으로 내보내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조금 신경질적이되기는 하지만 다른 변화는 없다구]
주인공은 난소제거수술을 하라는 친구의 말에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그런 일을...그런 자연스럽지 못하고 잔인한 일을.."
친구의 말이다.
"수술을 받는다면...애당초 자신에게 그런 욕망이 있었다는 걸 다 잊고.....어느 편이 더 잔인하다고 생각해? 실현할 수 없는 욕망이면 아예 잊는 편이 좋지 않아?"
하지만 주인공은 끝내 수술을 시키지 않는데, 나중에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을 때, 그 개는 주인공을 뿌리치고 길거리의 개와 합궁한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쯤되면 과연 수술을 안시키는 게 꼭 좋은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 아닐까?
딱 한번, 벤지에게 여자를 만나게 해주려는 시도를 했었다. 하지만 벤지의 주치의는 그걸 말렸다.
"한번 그 맛을 보면 집을 나가요. 더이상 애완용으로 기를 수가 없지요"
난 결국 그 생각을 포기했다. 그 때는 벤지를 위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사 따져보면 벤지가 내 곁을 떠나는 게 싫었던 것 같다.
<몽정기>를 보면 중학교 애들이 철봉에 매달려 자위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에게는 좀더 자라면 그간 참았던 정력을 쏟아부을 기회가 생기겠지만, 우리 벤지는 죽을 때까지 내 팔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이쁜 개들을 봤을 때 그라고 하고픈 마음이 없었을까. 그런 걸 보면 우리 벤지도 아예 욕망을 제거하는 게 더 행복한 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이 문제에 물론 정답은 없다. 욕망을 아예 모르는 상태와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 허기진 상태 중 어느 것이 좋은지. 하지만 그건 성대수술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목소리를 못내더라도 따뜻한 집과 풍부한 음식이 있는 곳을 애완견둘은 더 선호할 지 모르는 일이다. 대답할 수만 있다면 벤지에게 묻고 싶다. 지금 행복하냐고. 대답 대신 벤지는 잠을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