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을 보고 감상문을 쓰면서, "준하(원래 이름은 조승우인데, 안유명하니 그냥 준하라고 함)"라고 한 적이 있지요. 그나마도 '조승우'를 '조순우'로 잘못 썼구요.

그랬더니 밑에 이런 답글이 달리더군요. "조승우가 얼마나 유명한데요!"
그래요. 저만 빼고는 모두 조승우를 알고 있더군요.

전 영화를 굉장히 많이 본답니다. 주변에 저처럼 많이 보는 사람은 없다고 자부할 정도로요. 그런데 그렇게 영화를 많이 보는 것 치고는, 영화에 대해 너무도 무지합니다. 예를 들어 '수잔 서랜든' 하면 주위에서는 "아, 그사람 이러이러한 영화에 나왔었어'라는 말이 자동적으로 나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 영화를 봤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리도 잘 알 수가 있을까요?

전 <스파이더맨>에 MJ로 나오는 여자를 보고 "저런 얘가 어떻게 주연이냐"고 한탄한 적이 있었어요. 처음 보는 배우고, 별로 이쁘지도 않아서 한 소리에요. 그런데 알고보니 그 여자가 제가 일전에 봤던 <브링 잇 온>에 나온 여자더군요. 나중에 케이블에서 그 영화를 다시 보면서 '진짜 나왔구나' 하고 중얼거려야 했지요. 남들은 안본 영화의 배우도 다 기억하는데, 저는 왜 봤던 영화의 배우도 모를까요?

대충 생각을 해봤어요. 제가 왜 이리 무식한지. 다음과 같은 답이 나오더군요.
첫째, 원래 머리가 나쁘다. 이건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제 여친도 제가 영화의 줄거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경험이 반복되자 제가 바보라는 걸 알아채더군요.

둘째, 공부를 안한다. 영화만 본다고 다는 아니죠. 저처럼 영화만 달랑 보고 일어나면 백날 봐도 안되요. 정말 영화에 대해 잘 알려면 <시네 21>같은 영화 잡지도 보고, TV의 영화 프로그램도 봐야하며, 다른 이들이 쓴 영화 감상문도 열심히 읽어야겠죠. 하지만 저는 영화가 끝나면 엔딩 크레딧도 안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지요.

세째, 사람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친구 어머니가 반갑게 아는 체를 하면 저는 일단 인사를 한 뒤에 "혹시 누구 어머니세요?"라고 묻곤 하지요. 저희 회사 동료들의 얼굴-이름도 아직 외우지 못했답니다. 벌써 5년이나 지났는데 말에요. <러브 액츄얼리>를 볼 때도 바람 피는 아저씨랑 동급생을 좋아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를 동일인으로 알았지 뭡니까. 요즘 잘나가는 연예인들-비슷하게 생기기도 했지만-의 얼굴은 물론 구별하지 못하지요.

해답이 나왔으니 고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게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첫번째와 세번째는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고, 두번째는 노력하면 나아지겠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아직은 없습니다. 제가 뭐 영화로 일가를 이룰 것도 아니고, 영화에 투자할 여력도 별로 없답니다. 그냥 영화에 대해 문맹인 채로, 시덥지않은 감상문이나 쓰면서 살아가려구요. 체념의 지혜를 발휘하면 인생이 훨씬 편해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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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리릿 2004-01-25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은 증상인 것 같습니다. ^^ 단, 저는 씨네21나 영화평론도 꽤 읽는 편인데도, 영화배우의 이름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답니다. 사실은 학교 다닐때 후배들 이름, 입사해서는 직원들 이름 외우는데 애를 먹곤 합니다. 어제도 고향에서 친구들과 뭘 먹고 있는데 후배들 한떼를 우연히 만났는데.. 녀석들 하는 말, "선배~ 우리 이름 한번 말해봐요~" - - ; "어어... 어.. 야.. 날 시험하지마.. 다 알어.. "
아무래도 이름을 기억하는 뇌의 무언가가 기능이 안 좋은게 아닐까 싶어요.. ^^ 마태우스님은 다른 이름들은 잘 기억하시는 편이세요?

마태우스 2004-01-25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저와 증상이 같다니 위안이 되네요. 이름 외우기도 마찬가지죠. 자주 보는 친구 아이들의 이름을 모르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친척 아이들 이름도 잘 못외워,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많답니다. 희한하게도 야구선수같이 스포츠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줄줄 외우거든요. 이게 관심의 차이가 아닐까 싶어요.

진/우맘 2004-01-28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름 외우기, 사람 구별하기엔 젬병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머리나쁘다고 매도 당하기에는 조금 안타까운 상태인걸요~

ceylontea 2004-01-28 0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젠 책의 주인공 및 기타 인간들의 이름도 형태로만 읽는가 봅니다.. 책 읽을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읽고나면 이름들이 기억이 하나도 안나요... ㅠ.ㅜ

마태우스 2004-01-28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님들의 말씀에 큰 위로가 됩니다. 뭐, 기억 안나면 안나는대로 살면 되게지요^^

노바리 2004-01-28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감독과 배우들 이름을 너무 잘 기억해요. 사실은 안본 영화여도 그게 감독이 누군지 배우가 누군지 한번 보면 저절로 외워져요. 스스로도 가끔 놀라지요. 그런데 대신, 숫자엔 젬병이더군요. 아무리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숫자들. 그래서 저는 가끔 제 나이도 헷갈린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