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과목 수업을 했다. 내가 의대 사람 이외의 학생을 가르친 건 이번이 처음인데, 강좌 제목이 <한국인과 건강>이어서 내 강의의 소제목을 <한국인과 기생충>으로 정했고, 기생충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공존하자는 뻔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삼십분을 떠들었다. 하지만 슬라이드로 보여주는 기생충 사진에 비명이 난무하는 걸 보면, 별로 공존할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이왕 수업을 한김에 두명을 뽑아 내가 이번에 낸 책을 싸인해서 줬다. 그 두명을 뽑는 걸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을 하다, 수도 이름을 맞춰보라고 했다. 먼저 벨기에를 물었다. 답은 브뤼셀이건만, 강의실은 썰렁했다. 너무 어려운 걸 물었다 싶어 브라질을 물었다. 많은 이들이 손을 들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쌍 파울로라고 한다. 물론 답이 아니다.

강의가 끝난 후, 아는 사람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브라질 수도를 글쎄 상 파울로로 알고 있더라고" 그랬더니 곧 답이 왔다. "크크" 갑자기 의혹이 일었다. 얘는 알까? 웃는 그에게 전화를 했다.
"뭔데?" "리오 데 자네이로잖아!"

<나는 니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있다2>를 보면, 나쁜놈이 주인공을 섬으로 유인하기 위해 라디오 프로인 것처럼 전화를 한다.
"축하합니다. 여름 특별여행 퀴즈에 뽑혔습니다. 문제를 맞추면 공짜로 xxx 섬 여행을 보내드립니다"
흥분한 주인공은 "리...리..."만 연발하다, 컵에 씌여진 글자를 보고 답을 말한다. "리오 데 자네이로!"
그러자 답을 맞췄다면서 여행권을 보내주겠다고 하고, 그들은 음산한 분위기의 섬으로 여행을 간다. 나중에 살인자는 칼을 들고 그녀를 죽이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브라질의 수도는 브라질리아야!"

브라질도 틀리자 좀더 쉬운 걸 냈다. "룩셈부르크의 수도는?" 한 학생이 맞췄다. "룩셈부르크" 그에게 한권을 줬고, 기생충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는 남학생에게 또한권을 주고 이벤트를 마쳤다.

난 수도이름을 제법 잘 아는 편이다. 나같은 애가 가끔씩은 있어, 그런 애들끼리 만나면 피튀기는 접전이 벌어진다. 아르헨티나(부에노스 아이레스)나 칠레(산티아고)같은 쉬운 나라는 아예 묻지도 않는다. 파라과이-아순시온, 베네주엘라-카라카스, 불가리아-소피아, 페루-리마, 이런 식으로 우리랑 거의 왕래가 없고 멀기만 한 나라들을 서로 물어보며 자웅을 겨룬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어쩜 벨기에처럼 쉬운 나라도 모를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당시 우리가 수도이름대기 같은 걸 하고 놀았던 이유는, 달리 놀만한 게 없어서였는지 모른다. 지금 애들이야 어디 그런가. 컴퓨터가 있고, 각종 장난감도 우리가 꿈에서나 그리던 것들, 그런 환경에서 고리타분하게 수도나 외우고 있을 수야 없다. 스위스에서 가장 큰 도시는 제네바지만, 수도는 베른이라는 것, 이스라엘의 수도가 예루살렘이 아니라 엔테베라는 것, 이런 것들을 알아서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담? 중요한 것은 수도가 어디 있느냐가 아니라, 한번이라도 거길 가봤냐가 아닐까? 수도를 모르더라도, 외국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요즘 애들이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온 나보다 훨씬 더 나은 게 아니겠는가?

공상으로만 하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요즘도 가끔 수도이름 대기를 하지만, 그런 내기는 아마도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이왕 말이 나온김에 몇가지만 더 적어본다. 뉴질랜드는 웰링턴, 에이레는 더블린, 방글라데시는 데카. 이름대기가 아니면 이 지식을 어디다 써먹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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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3-26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어릴 때 꽃이름 대기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거 많이 대려고 <컬러 대백과 사전>을 무수하게 뒤졌지요.^^;;;

비로그인 2004-03-26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적에 부루마불 한참 할때는, 각국의 수도 이름을 좍좍 댈 수 있었는데요~ 그런면에서는 좋은 게임이었던거 같아요. ^^ 수도 이름 대기 놀이하면서도 실력이 엄청 늘었더랬는데, 이젠 저두 거의 다 잊어버렸다는...^^;;

비로그인 2004-03-26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다 써먹고 있으면서 뭘~~그래요!! 진짜 뿐빨해야겄네요.

플라시보 2004-03-26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민학교 다닐때 사회 시간에 수도이름 외운것 같아요. 그때 어느나라 수도인지는 몰라도 '카트만두'가 제일 기억에 남는군요. 네팔이나 뭐 그런곳 같은데... 아무튼 저도 이제는 수도 이름은 거의 다 까먹어서 기억나는게 없습니다.

비로그인 2004-03-26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끙....암데나 책 펼치곤, 사람 머릿 숫자 세서, 많이 나온 사람이 적게 나온 사람 심부름 시켜 먹기 뭐 이딴 짓이나 하던 제 어린 시절이 너무 부끄럽군요....... 각성..... 각성.....

연우주 2004-03-27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수도 이름 거의 모르는데요. 가끔 수도 이름 대기 같은 거 하자고 하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경우 뭐라는겨 시방? 하면서 무시해줬었는데, 마태우스님이 그 분이셨군요...^^ 중고등학교 때 배운 지리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왔어요~~~ 괴롭히지 마세요..ㅠ.ㅠ 엉엉.
 

 

 

 

 

 

술약속이 없어 집에 일찍 왔다. 일찍 오니 세상이 아름다웠다. TV로 농구를 보면서 러닝머신을 하고, 엄마가 차려주신 맛있는 식사를 하고, 벤지와 간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그간 밀린 글들을 몇편 썼으며, 100분 토론까지 볼 수 있었으니,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겠는가?

요즘은 토론을 볼 때 참석자들을 따져가며 본다. 뭔가 대단한 인물, 예를 들어 "파병을 해서 미국을 감동시켜야 한다"던 송영선이나, "난 기업인이다!'라고 선언했던 박상희 등이 토론에 나오면 꼭 보고, 안그러면 책을 봐버린다. 어제 멤버엔 박상희급 인물이 없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즐거운 토론이었다고 생각한다. 왜? 자민련의 유 모라는 사람 때문에. 사실 난 자민련 소속으로 누가 나오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지지도 1%도 안되는 정당에 몸을 담는 것도 그렇고, 그 정당의 말도 안되는 짓거리를 온몸으로 커버해야 하니까. 지난주에 나왔던 자민련 사람도 김경재로부터 "자민련은 언급할 가치가 없습니다"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었지 않는가. 그런데 어제 나온 사람은 일말의 동정을 갖기엔 지나치게 '확신범'이었다. 그는 마치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듯했는데, 자민련은 어떻게 그런 사람을 구했는지 능력도 좋다. 그의 활약상을 보자.

"여론조사는 우리가 꼴찝니다. 여론조사의 신뢰도는 믿어줘야겠지요. 하지만 자민련 옹호층은 보수층이라, 여론조사에 잘 응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여론조사를 할 때 50, 60대가 받으면 끊어버린다고 합니다"
뭐야, 여론조사를 믿는다는 거야, 안믿는다는 거야? 손석희가 질문을 하자 이런 대답을 한다. "여론조사 방법이 자민련에게 불리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대답엔 그냥 웃어주자. 음하하하.
"지난번 총선 때도 지지율이 1%였습니다. 하지만 실제 득표율은 10,8%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충청권에 자민련 바람이 불거라는 얘긴가보다. 글쎄다. 그럴 수 있을까?

여론조사를 불신하는 건 그렇다 치자. 공부 못하는 애들이 꼭 "공부 안한 데서 시험문제가 나와서"라고 하지 않는가. 내가 그를 확신범으로 확신한 건 다음 말이었다.
"촛불시위에서 민주수호를 외칩니다. 그 민주가 자유대한의 민주냐, 북한의 민주냐?"
거의 멸종한 줄 알았던 수구냉전론자를 찾아서 공천하는 자민련의 능력, 솔직히 존경스럽다. 그의 열변은 계속된다.
"세계는 우경화하는데, 우리만 좌경으로 가고 있다. 그 속에서 진보가 나오고 민주가 나온다"
이 상황에서 이상현 민노당 대변인의 말은 참으로 적절했다. "그러니까 자민련이 수구라고 하는 거다"

이쯤 되면 그만할 법도 한데, 그냥 물러나면 확신범이 아니다.
"촛불시위엔 많은 의혹이 제기되고 있어요. 참석자가 노사모, 시민단체...게다가 열린우리당에서 버스를 동원하고... 저도 한번 가봤는데요, 촛불을 개개인이 가져오지 않고 나눠주더라구요. 13만개면 한 개에 1000원이라도...얼맙니까? 그 13만이 자발적으로 나왔냐, 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초는 재활용을 하고, 참석자들이 자발적인 성금을 낸 돈으로 산다. 한번도 자발적인 지지자를 만난 적이 없는 자민련 지지자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만, 자기가 그랬다고 남들도 다 그러는 건 아니다.

사실 촛불집회는 자발적이지 못한 구석이 많이 있다. 남들 다 노는 주말에 광화문 바닥에 쪼그려 앉아 떨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썩어죽일 놈들이 탄핵을 하고, 실업자나 간다고 계속 자극을 해대니까 할수없이 나가는 거 아닌가. 다른 것도 다 그렇지만, 자민련 그사람은 정말 문제가 있다. 어떻게 "우리 당은 탄핵에 반대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걸까? 그 193명의 쳐죽일 놈들 중 자민련 10명이 포함된 건 세상이 다 아는데, 여론이 안좋으니까 계속 "탄핵에 반대했습니다?" 자신이 한 짓거리에 대해 책임을 지게나. 참고로 남들은 '한-민-자'라고 부른다네. 하지만 그 뻔뻔한 인간은 시중에 떠도는 말이라고 전제한 뒤 "한나라당, 민주당이 노문현과 열린우리당이 쳐놓은 덫에 걸렸다. 믿고싶지는 않지만"이란 헛소리를 했다. "탄핵의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습니다. 한게 뭐가 있습니까?"는 그런대로 들어줄 만 하지만, "탄핵은...끌어내리려 한 게 아니라 경각심을 주려는 것"이라든지 "탄핵정국의 해법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있다"는 말은 그저 웃음만 나온다. 아니 겨우 경각심을 주려고 이 난리 부르스를 췄던 건가?

참, 한가지가 더 있다. 민주노동당 대변인에게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를 위한 당이지, 국민의 정당은 아니다!"라고 말한 것. 분위기가 어수선해 묻혀 버렸지만, 이거야말로 자민련의 실체를 잘 나타내 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노동자는 그럼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1천만 노동자 운운하지만, 나처럼 월급받고 사는 사람은 사실 다 노동자, 그렇다면 자민련이 생각하는 국민은 사장이랑 자영업 하는 사람들 뿐인가?

자민련에게 가려서 빛을 보지 못했지만, 유종필 민주당 대변인도 참 측은했다. "선거는 선거다. 탄핵만 가지고 투표하지 말"잔다. 탄핵 후 지지도가 급락하니 이따위 소리를 하는데, 탄핵이 지들 말대로 정정당당하고 옳은 일이었다면 탄핵을 이슈로 총선에 임해야 하는 거 아냐? 심지어 이런 말도 한다. "헌재에 따른다는 승복선언을 해야 한다!"
아니 헌재 결정을 따르지, 누가 안따른다고 했나? 손석희가 되묻자 이런 답변을 한다. "촛불집회가 지금 압력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고... 결정이 불리하게 나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아이고, 정말 걱정도 팔자다. 니들 총선에서 박살나면 뭐먹고 살지 그거나 걱정해라.

한나라당 은진수는 그런대고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나라당 치고는 그렇다는 거지, 평균적인 국민수준에 있다는 건 아니다. 열린우리당이 250석을 얻을 것 같다느니, 그래서 일당독재가 우려된다는 말은 일당독재의 폐해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한나라당 애로서는 할 말이 아니지 않을까? 지가 250석을 얻을 것 같다고 말해놓고선 갑자기 "열린우리당의 50%는 거품입니다"라고 하는 걸 보면, 자기도 굉장히 헷갈리나보다.
"우리도 좋은 신인들이 많이 있는데, 탄핵의 역풍 때문에 자신을 알릴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고 말하는 은진수, 그런 것도 예상 못하고 탄핵을 했습니까?

탄핵 철회에 대해 은진수는 이렇게 말했다. "선진국의 근간은 법치주의입니다. 엘 고어가 득표는 이겼지만 선거인단에서 져서 깨끗이 승복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지. 우리나라는 선거인단이 아니라 총득표수로 승패를 가르니까. 그런데...한나라당이 승복 운운하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대선 직후 사상 초유의 재검표로 인해 아까운 국고가 낭비됐고, 요즘 읽고 있는 책을 보니 이런 말도 나온다.
"한나라당 모든 의원 및 당원들에게 물어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지난 대선은 무효다,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도 대선무효소송이 진행 중이잖아요(우리가 이들에게 희망을 걸어도 좋은가, 지승호 저, 343쪽)"
대선이 끝난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라도 제발 좀 승복하거라.

은진수의 히트작 중 한가지. "송두율 같은 사람이 수구입니다!"
혹시 그의 주변에 송두율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의 수구파가 있는 건 아닐까? 이래서 난 토론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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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3-26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번 서재에서 했던, 자신에게 맞는 당 찾는 프로그램 있지 않습니까? 의외로 많은 분들이 일희일비 하시기에, 혹여 내가 어디서 조작된 프로그램을 올린 건 아닌가...걱정이 되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시 해 봤었습니다.
모든 질문에 다 '모르겠다'고 답변하니, "성의껏 질문에 응해주십시오."하는 결과가 나오더군요. 호오....그래?
이번에는 제 기준에서 '설마 이런 사람도 있으랴.'하는 심정으로, 막가는 답변을 했습니다. 결과는....자민련이더군요. ㅎ...ㅎ...ㅎ...

가을산 2004-03-26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동자, 그렇다면 자민련이 생각하는 국민은 사장이랑 자영업 하는 사람들 뿐인가? "
그러니까 '자'민련이겠죠. ㅡㅡa
근데 정치인들 정말 변신 잘하네요.. 지난번 총선때 분명히 자민련으로 출마했던 사람이 이번에는 한나라당으로 출마하네요. 대전도 이번에는 자민련 지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야 할텐데...

mannerist 2004-03-26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프로그램 아주 잘 맞던걸요. 재밌는것이, 탄핵에 반대하는 제 지인들의 선호정당 결과가 타국당, 열우당, 잔민당 비슷비슷하게 나왔습니다. 결국, 얘네들 정책상으로는 별반 차이 없다는걸 얘기해주는 거죠. 덕택에 균형감각 좀 있다고 자부(혹은 착각)하는 사람들 상대로 '국가보안법 고칠 필요는 있지만 있어야 되지 않냐?'란 물음에 똑같은 이야기를 몇번이나 했는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지금 국해의원 수준 일반 한국인들과 별반 다를게 없어보이더군요. 어디까지나 '국정교과서', '군대', '돼먹지못한 언론 통제'에 길들여져 있다는 걸 감안해야겠지만요. 하여간 그거 유익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칼잡이들의 이야기 보르헤스 전집 4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 민음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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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작가 보르헤스, 작품도 명성이 자자하지만, 난 그가 40도 되기 전에 실명을 하고도 주옥같은 작품들을 계속 써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명성에 기가 죽어, 난 작년까지 그의 책들을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안유명한 책만 읽으면서 히히덕거릴 거냐 하는 자책감이 들어 그의 책 다섯권을 한꺼번에 주문했고, 이 책은 내가 읽은 <보르헤스 전집> 중 4번째 책이다. 유명한 책은 사실 의미심장한 뭔가가 있다는 얘기지, 읽기가 겁나게 난해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그의 책들은 보여줬다. 의무감에서 책을 집어들었지만, 그의 책들은 재미있게 읽혔다. 물론 내가 그 책의 가치를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환상적 사실주의, 보르헤스의 책을 읽으면서 계속 들었던 말이다. 난 그가 왜 그렇게 사실과 환상을 섞어서 쓰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유명 작가니까 뭔가 심오한 뜻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두 파트로 나뉘어 있다. <작가>와 <칼잡이들의 이야기>로. 후자는 내가 읽었던 보르헤스의 다른 단편들과 비슷한 내용이지만, 전자는 전혀 다른, 짤막짤막한 단편들이 주를 이룬다. 솔직히 말해 난 그 단편들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도 모르겠고, 재미있지도 않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책을 몽땅 번역해 온 황병하는 그 단편들이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넓혀"줬으며 "환상 문학의 새로운 지층을 열어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경탄을 금할 길이 없게 된다"고 말한다. 그 혼자만 그러는 게 아니다. 보르헤스의 '가장 충실한 미국적 추종자'라는 존 바스는 "보르헤스의 소설 중 가장 매력적인 작품들이 바로 <작가>에 실려있는 짧은 단편들이라고 밝"혔단다. 그러니까 이 둘은 내가 갖지 못한 어떤 심미안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 심미안이 부럽고, 갖고싶긴 하지만, 포도를 먹지 못한 여우처럼 난 이렇게 말하련다. "그런 심미안을 가지면 다른 책들이 죄다 재미없고 짜증날 거야!"라고. 우하하하하.

번역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지만, 약간 불만스러운 점이 있다. '어미'가 지나치게 통일되어 있다는 것. 101페이지에서 처음 몇 문장의 끝부분을 한번 보자.
[...사람이지요...법이지요...못했지요...부인이었지요...알고 있었습니다...때문이죠...잡초처럼 자랐지요...놀이를 벌이곤 했지요... 없었거든요....때문이었지요]
읽기에 큰 지장은 없다해도, 약간 짜증스럽다. 보르헤스도 그렇게 문장을 썼는지 몰라도, "사람입니다....법이지요...못했답니다..." 이런 식으로 바꾸면 짜증이 덜 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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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npoop 2004-04-14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어떤 작가의 책을 읽을 것인가에 더해서 어떤 사람의 번역본인가도 신경이 쓰이더군요..
 
크라잉 넛 - 그들이 대신 울부짖다
지승호 외 지음 / 아웃사이더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책을 산 건 1년여 전이지만, 읽은 건 최근이다. 이렇게 늦어진 이유는 내가 <크라잉 넛>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난 인디밴드와 언더그라운드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인디밴드는 죄다 헤비메탈의 시끄러운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아는 분한테서 '불독맨션'이라는 그룹의 판을 받고-그녀는 이런 좋은 판을 선물하는 게 기쁘다고 했었다-꼭 그게 아니구나, 정말 좋은 노래를 하는 그룹도 많구나 하는 걸 느꼈지만, 그렇다고 내 관심이 그쪽으로 간 것도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요즘의 난 언더고 오버고간에, 가요계에 별반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되버렸다. 마지막으로 판을 산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 이 책을 읽으면서 <크라잉넛>에 대해 많은 생각을-좋은 쪽으로-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다시금 가요계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한번 떠난 관심은 여간해서 돌아오기 힘든 법이고, 가요계 대신 정신을 쏟을 다른 취미가 너무 많이 생겨버렸으니까.

이 책은 아웃사이더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첫 단행본인데, 출판사 대표에 의하면 "<크라잉넛>은 상업자본에 의지하지 않고 나름의 목소리를 지키며 확대시켜온 몇 안되는 한국의 밴드"이기 때문이란다. 언더에 있던 그룹이 "말달리자"같은 히트곡을 내면 갖은 시기가 뒤따른다. 변절했느니, 상업성과 타협을 했느니... 난 물론 그런 시각에 결코 동의할 수가 없다. 언더라고 히트곡을 내면 안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라고 산소만 먹고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중요한 것은 뜨고 안뜨고가 아니라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크라잉넛>의 훌륭한 점은 그들이 전국적인 유명인이 되고 나서도 자신의 터전이었던 '드럭'을 지켰다는 것이며, 언제나 일관되게 자유를 지향한다는 것이리라.

인터뷰를 보면서 '이렇게 발랄한 애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어보자.
[-3집의 경우..소장가치 만땅이다, 그들이 어느덧 빛나는보석이 되었다, 등의 호평을 듣기도 했는데요.
=뭐 평론가와 술자리를 몇 번 같이 했고...
-하지만 일부 팬들로부터는 변질된 것 아니냐는 반응도...
=그렇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같이 술 한번 마시면 되게 좋아하던데요

-그룹을 하다보면...불화를 겪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요..
=저희는 그냥 주먹다짐으로 끝나요]

평론가 성기환은 이렇게 말한다. "(크라잉넛에게는) 세상이 무대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그들의 음악이 살아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구분없음 때문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연기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 나도 인터뷰를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하나같이 장난스럽고, 그러면서도 음악적 자의식이 있는 멋진 가수들, 이정도라면 좋아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 참고로 그들과 인터뷰를 한 사람은 인터뷰 전문기자인 지승호인데, 그는 드럭에 가서 직접 공연을 듣는 열성을 보였다. 그의 인터뷰들이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의 성실성 때문이리라.
[-4집에 실릴 노래엔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가 삽입되었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거 어떻게 아셨어요?
-지난주에 드럭 공연보러 갔었어요...]
이래서 난 지승호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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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3-26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반갑습니다!
 

 

 

 

 

 

46번째 술
일시: 3월 23일 (화)
누구랑?: 초등동창 신촌파와
마신 양: 소주 1병--> 2차 가서 생맥주

47번째 술
일시: 3월 24일 (수)
누구랑?: 내 죽마고우와
마신 양: 소주 1병--> 친구가 맡겨놓은 양주

나빴던 점: 저녁을 안먹고 술만 먹었더니, 집에 가서 라면에 밥까지 말아먹어야 했다. 오늘 아침, 내 얼굴은 두배가 되었었다.

내일도 마셔야 하고, 토요일도, 월요일도 마셔야 하니, 3월달은 이래저래 50회를 넘기게 생겼다. 이런 식으로 12개월을 간다면-12월의 연말 특수를 감안한다면 더더욱-200번이 넘을 듯 싶은데, 180회 이하로 줄이겠다는 목표는 200번 정도로 상향조정하는 게 나은 것 같다. 나란 놈은 워낙 삐딱해서 "어차피 목표달성에 실패했는데.."라며 자포자기로 술을 엄청나게 마셔댈 것이 뻔하기 때문. "3월 25일, 연간 180일 목표는 200일 이하로 수정한다. 땅땅땅"

부제: 휴대폰

화요일 오후 5시 반, 모임에 참석할 예정인 전용학(가명)이 전화를 걸었다. "오늘 7시 현대백화점 맞지? 이따 보자!"
6시 10분, 모임의 주동자인 유부녀가 급전을 때린다. "민아, 큰일났어. 나 오늘 못가게 되었는데 어떡해? 남편이 아프데"
그녀 없는 모임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 그때부터 난 참석자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기옥(가명)이가 못나오거든? 모임을 금요일로 미뤄야겠다"고.
다들 연락이 됐는데, 전용학과는 통화를 못했다. 휴대폰이 꺼져 있다는 메시지만 나온다. 걔만 안나오면 그냥 집에서 쉴텐데... 누군가는 전용학을 책임져 줘야 하는 노릇, 나가지 말라고 슬픈 눈으로 날 바라보는 벤지를 뿌리치고 난 현대백화점 앞으로 갔다. 전용학과 또다른 친구-예상을 못했는데...-는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난 그들과 아주 즐겁게 술을 마셨다. 한국 스포츠의 전반적인 상황을 짚어가면서 말이다.

휴대폰이 있는 탓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사람과 연락이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휴대폰이 꺼져 있으면, 혹은 신호는 가는데 안받으면 정말 답답하다. 아는 거라곤 휴대폰 번호밖에 없기에 다른 대책도 없다.

내가 술을 먹고 휴대폰을 잃어버렸을 때, 홧김에 2주간 휴대폰이 없이 산 적이 있다. 그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와 연락할 방법이 휴대폰 말고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라고. 조금 불안하긴 했어도, 난 그동안 아주 잘 지낸 반면 남들은 내가 휴대폰이 없으니 너무너무 불편했단다. 그렇다. 휴대폰은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남들을 위한 거다.

어찌되었건 휴대폰이 있기에 사람들은 돌발 술약속을 할 수가 있다. 수요일날, 퇴근을 하려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전화가 왔다. "민아, 술한잔 하자!" 그 친구가 전화했을 때 늘 다른 약속이 있었지만,어젠 마침 약속이 없었다. 그래서 난 그와 새벽 한시가 넘도록 여기저기서 술을 마시다 집에 갔는데, 내가 휴대폰이 없었다면 그런 식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휴대폰은 내가 술마시는 빈도를 증가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을게다.

과거 삐삐가 있을 때, 삐삐에서 얄미운 사람이 삐삐 쳐놓고 통화중인 놈, 전화안받는 놈, 전화 건 적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사람 등등이었는데, 휴대폰 시대에 얄미운 사람은 전화 꺼놓는 사람과 안받는 사람이다. 아니 진동으로 해놓으면 될 걸 왜 꺼놓는담? 방금 전까지 '통화중이오니...'라는 멘트가 나오던 사람이 신호는 가는데 안받으면 정말 얄밉다. 특히나 안받는 와중에 신호가 칼라링이라, 노래가 나오거나 그러면 더 얄밉다. 어제 그걸 절실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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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4-03-25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심심하면 느닷없이 전화해서 지인들에게 밥 사줘요! 이거 잘 해요. 바로 오후에 전화해서 저녁에 만난다거나 아니면 1-2시간 전에 전화해서 만난다거나 하는 일이 있었는데 핸드폰이 없다면 불가능했겠지요? ^^

비로그인 2004-03-25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핸드폰에 얽힌 얘기는 언제 들어도 공감 200%군요. 정말 폰이 꺼져있을때 막막한 경우가 많죠. 특히 주변사람이. ^^ 그리고, 알콜대상을 뽑은 이후론, 마태우스님의 술일기가 너무 약해보인다는 생각이...호홋~~

비로그인 2004-03-26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제 아무리 좋은 휴대폰도 제 손에 들어오면 통신이 마비되는 것이
-제손에 알지못하는 전파가 나온다는 설도 있음-.....핸드폰 1년 넘기기가 힘들었는데....
어젰든, 휴대폰 생기고 처음으로 1년을 넘겼습니다. 전화는 당연히 (?) 잘 안되지요.
부재중 수신전화가 기본 세시간 심할 땐 하루 뒤에 표시 되고,
문자는 기본 5번 이상의 시도를 해야 되죠. 어쩌다 한 두 번 만에 가면 너무 좋아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다는.....휴대폰이 남을 위한거라.... 는 말씀에 동감하며,
이번 주말엔 우리 폰이 데리고 꼭 병원에 한번 가야 겠습니다.

비로그인 2004-03-26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말한 얄미운 인간형이 접니다!! 휴대폰도 그냥 꺼버리면 안됩니다. 밧데리가 부족해서 꺼지는 경우는 신호음이 몇번 안 울리다 멘트가 나오지만 일부러 끈 핸폰은 "전화기가 꺼져있습니다." 이 반응이라 전 늘 핸폰에 달랑달랑한 밧데리를 소지하고 다니지요. 허나 저한테 밧데리가 없었네~ 진동이네~ 고장났네~의 변명을 늘어놓는 인간은 이유불문하고 그에 합당하는 금전적인 손해를 각오해야죠.

플라시보 2004-03-26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전화 안받을때 컬러링 나오면 '이게 누굴 농구나?' 싶어 약이 오릅니다. 그래서 전화에 컬러링 되어 있는걸 아주 싫어합니다.

진/우맘 2004-03-26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4년, 삐삐와 PCS 사이에 짧은 인생을 누리고 사라진 '시티폰'이라는 것이 있었지요. 이것이, 받지는 못하고 걸수만 있는 전화였는데...그러니까, 삐삐로 번호를 받아 바로 전화를 할 수 있는, 그런 용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놈의 한계점 하나, 2층 이상의 높이에서는 거의 걸리지 않았지요.
우리 서클은 7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엘레베이터가 없었어요. 공중전화는 5층에 한 대 있었는데, 이나마 절반 이상 고장 상태였지요. 그래서 급한 삐삐가 오면, 그 시티폰을 보유한 선배에게 애걸복걸하여 전화를 얻어서는, 7층 창 밖으로 최대한 몸을 뻗쳐서 전화를 걸곤 했어요. 아찔한 높이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우리를 보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몇 번 놀랐다죠.
젊은 몸뚱이 가지고, 2층까지 한 번 뛰어갔다 올 일이지....부모님이 주신 목숨을 왜 그리 하찮은 데 걸었는지. 쩝.

마태우스 2004-03-26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시티폰을 생각하면 언제나 슬퍼집니다. 대형 사기극에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으니깐요...
플라시보님/그쵸???? 컬러링 너무 싫죠????
폭스바겐님/님의 컨셉은 쿨함인 듯...^^

마태우스 2004-03-26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weetmagic님/휴대폰이 그러면 참 골치아픈데...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할 수도.... 꼭 병원에 다녀오세요.
앤티크님/오늘 저녁 큰 시합이 있답니다. 내일 술일기는 소주 두병 플러스 알파로 시작할 수 있기를 기대해 주세요.
파란여우님/님이 올려주신 소주를 보니 의욕이 더 샘솟는군요. 으음...오늘 사고 한번 치겠습니다!
우주님/님이야 뭐 인기가 좋으니까 사달라면 다 사주겠죠^^

연우주 2004-03-26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인기 없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