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선 물리적 힘이나 지위의 높낮이가 갈등의 결말을 좌우한다. 온라인이라고 다를 게 없어, 서재계의 크고 작은 다툼은 서재권력의 유무로 정해지며, 정확히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권력의 크기는 즐겨찾기 숫자와 얼추 비례한다. 대통령이 특정인물을 찍어서 괴롭히기로 마음을 먹으면 이 나라에 사는 게 고달파지는 것처럼, 즐찾이 많은 사람과 싸우고 나면 이곳에 머무는 게 영 불편해진다. 보기 싫어도 곳곳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으니까.
지금까지, 내가 누군가에게 한마디만 하면 그 누군가는 서재를 나가거나 있던 글을 다 지우고 칩거하곤 했다. 그때마다 탄식한다. ‘아, 내가 이리도 무시무시한 칼을 갖고 있구나.’ 문제는 내가 칼의 무시무시함에 비견될 인격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 조금 지나고 나면 별 게 아닌 일도 당시엔 뭐가 그리 억울한지, 기어이 한마디를 해버린다. 그리고 내가 던진 글은 당사자에게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되고, 그는 서재를 떠난다. 그가 즐찾 수가 좀 되는 사람이라면 내게도 “왜 그랬냐?”는 비난이 날아올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그의 유무에 무관하게 서재는 여전히 따스하고 훈훈하게 돌아간다.
그렇게 내가 내보낸 사람이 좀 된다. 내가 아는 또 다른 권력자와 “우리 둘 중 누가 더 많이 내보냈냐”고 농담을 하기도 하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가 나간다는 건 정말 가슴아픈 일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따지고보면 별 게 아닌 일인데! 세상의 모든 갈등은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다지만, 막상 자신이 그 당사자가 되고나면 스스로가 한심하다. 뒤늦게 숱이 많은 내 머리칼을 쥐어뜯어 보지만, 글을 상대방이 읽은 이상 돌이킬 수는 없다.
올해 난 마흔이 되었고, 내년이면 마흔하나가 된다. 그리고 즐겨찾기는, 쑥스러워 밝히지는 못하겠지만, 수백명을 헤아린다. 내 권력은 그러니까 다른 분들이 날 좋아해 줘서 만들어진 거다. 유전학의 역사를 되짚어 보니 노벨상을 탄 사람들 중엔 반전, 반핵 운동을 열정적으로 펼쳐 여권 발급도 안된 분도 있다. 노벨상과 즐찾은 엄연히 다른 차원이지만, 즐찾으로 얻은 권력을 좋은 일에 써도 모자랄 판에 번번이 다른 사람을 내쫓는 일에만 쓴다니 내 자신이 한심하다.
이십대 때는, 마흔살이 되면 공자의 말처럼 세상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마흔을 넘은 나는 여전히 질풍노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의문이 생긴다. 공자가 말한 것은 ‘만 나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