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의 만화 중 가장 재미있게 읽은 게 바로 <대머리 야구단>이다. 내가 좋아하는 야구 만화면서 당시 정치상황에 대한 풍자까지 곁들여져, 자지러지게 웃으며 봤던 기억이 난다. 에피소드 중 하나. 한 선수가 성적도 안좋고 나이도 많고 해서 은퇴를 결심했다. 은퇴를 발표한 경기에서 그는 상대편 투수에게 가서 이렇게 말한다.

“내 은퇴경기라고 살살 던지지 말게.”

상대 투수는 감동한다. “아, 훌륭한 선배...”

투수는 그에게 치기 좋은 공을 던져주고, 그는 5타수 5안타를 친다. 그러자 그는 다음 경기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하고, 그전과 똑같이 5안타를 친다. 4게임을 이러고 난 뒤 그는 혼잣말로 말한다.

“내가 지금 4게임에서 20안타를 몰아쳤는데, 왜 은퇴를 하냐?”

다섯 번째 게임에서 또 그 전략을 쓰려고 하자 상대 투수가 이런다.

“지금 당신 팀 선수들이 전부 나한테 와서 은퇴한다고 했다.”


지난 6월 열렸던 독일 월드컵, 난 지네딘 지단을 보면서 허영만의 만화를 떠올렸다. 당시 지단은 “이번 대회를 끝으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니 프랑스가 지는 순간이 곧 지단의 마지막 경기인 셈. 상대 팀 선수들은 “내가 지단을 집으로 보내겠다.”고 맞섰지만 지단은 끝까지 남았고, 결국 준우승에 골든볼까지 차지하며 화려한 은퇴를 한다.


은퇴경기, 그것도 지단처럼 위대한 선수의 은퇴경기는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기 마련이다. 팬들은, 설사 지단을 좋아하지 않았던 팬이라도, 지단을 더 못보게 되는 게 아쉬워서 지단을 응원한다. 상대선수는 관중의 미움을 몸으로 느끼며, 프랑스한테 져주는 게 선배에 대한 예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한다. 예선전 이후 프랑스와 붙었던 팀들이 예상외로 부진했던 건 그래서가 아닐까? 이탈리아가 이긴 건 지나 이기나 그게 지단의 마지막 게임이기 때문이고 말이다.




정교한 스트로크를 주무기로 재미있는 테니스를 팬들에게 선사했던 안드레 애거시가 이번 US 오픈을 끝으로 은퇴한단다. 언론은 ‘애거시의 이별 여행’ 이러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대스타의 은퇴를 아쉬워하고 있는데, 애거시는 첫 경기에서 파벨이란 선수에게 3대 1의 승리를 거두고 이별여행을 계속하게 됐다(US오픈 홈페이지, The Agassi show continues!). 세트스코어 1대 1에서 파벨이 4대 0까지 앞서다 역전당한 것이 승부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파벨이 애거시를 이기는 게 영 부담스러운 나머지 자기 플레이를 못했다는 것이 내 추측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 우승까지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도 드는데, 그러고 보면 시합 전에 미리 은퇴를 선언하는 것도 괜찮은 전략이 아닐까 싶다 (샘프라스는 그런 이벤트 없이 갑자기 은퇴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테니스 애호가인 나 역시 애거시의 은퇴가 아쉽다. 샘프라스나 베커가 강력한 서비스만으로 테니스계를 지배할 때, 테니스가 왜 재미있는 경기인가를 보여준 건 애거시 뿐이었다. 그래서 걱정이다. 강한 서비스를 위주로 한 힘의 테니스가 판치는 세상에서 내가 계속 테니스를 사랑할 수 있을지가. 언제 떨어질지 모르지만, 기술 테니스의 진수를 보여 준 애거시에게 미리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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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ylontea 2006-08-30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우리 진/우맘은 돌아왔답니다.. ^^

oldhand 2006-08-30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클 창도 있어요. ^^ 근데 창도 은퇴했나요?

날개 2006-08-30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테니스계를 떠나 배드민턴계로 오시지요.. 배드민턴이야말로 진정한 기술의 경기라는......ㅎㅎㅎ

비자림 2006-08-30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골프를 배워 보심은 어떠하온지? 공 갖고 하는 스포츠라면 뭐든 덤비는 제 옆사람 노후대책이 그거랍니다.^^

Mephistopheles 2006-08-30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가시가 은퇴를 하는군요...
그의 번쩍거리는 대머리를 더이상 코트에서 볼 수 없다니 아쉽네요..^^

moonnight 2006-08-30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쉬워요. 테니스 선수중 그나마 이름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은퇴하는군요. 흑흑. ㅠㅠ

Kitty 2006-08-3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퇴 경기가 자꾸 미뤄지고 있군요 ^^
지금 막 TV로 블레이크와의 준준결승전 봤는데 완전 역전으로 이겼네요 ^^;;
애거시 대단!
아참 전 베커의 팬이었지요 ^^

진/우맘 2006-08-30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왜....제목을 보고 추리소설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를 떠올린걸까....
여하간, 여러모로 적응이 필요한....ㅡㅡ;;;;;;

기인 2006-08-3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샘프라스도 은퇴했어요? 오옷. 애거시도 은퇴하고. 그래도 꽤 오래 선수생활 잘 했네요. 힝기스는 잘 하고 있나 모르겠네요. 운동선수들의 삶은 어떨지, 불꽃처럼 타고 숯이 되어 오래오래 따뜻한 노후를 지내는 경우도 있겠지만, 타보지도 못한 사람들도 많겠네요. 음~ (갑자기 안도현 시인의 '연탄불 함부로 차지 마라'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 )

마태우스 2006-09-01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어..샘프라스가 은퇴한지가 언젠데요... 힝기스는 잘하고 있는데요 그건 그녀가 겨우 스물여섯밖에 안되서 그런 겁니다. 데뷔를 열여섯인가 했으니... 운동선수의 삶은 집시에 비유됩니다. 대회를 쫓아 각 나라를 돌면서 사는 삶...그래서 애들이, 가끔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는...
진우맘님/님의 댓글을 다시 보게 되리라곤 생각 못했는데...추천보다 더 반갑소
키티님/호, 혹시 그전대회 녹화방송 보신 거 아닌가요...블레이크라고 하니 올 호주오픈이 생각나는데요... 애거시는 바그다티스에게 3대 2로 이겨서-역전이 아니라 2대 0으로 앞서다가-3회전 진출했어요. 대단하죠
달밤님/그래도 달밤님을 알게 되어서 좋아요^^
메피님/그가 원래 대머린지 아닌지가 궁금...하지만 대머리니까 그랬겠죠?? 두상이 이뻐서 잘 어울렸어요
비자림님/골프는 별반 의욕이 안생겨요 비싼 것도 맘에 안들고 하루종일 시간을 내야 하는 것두...
날개님/아참 님과 배드민턴 쳐야 하는데... 날 잡는 게 이리도 어렵군요...죄송합니다...
올드핸드님/마이클 창이 은퇴한 건 모르겠지만, 십년 정도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실론티님/그러게요 갑자기 돌아오셨더이다^^

모1 2006-09-02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테니스를 휘업잡았던 그 애거시군요. 저 사진은 현재모습인가요? 전성기때 꽤 날렸던 외모로 기억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