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올리려다 알았습니다. 세상에,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일어났군요. 11센티면 너무 길고, 3센티는 너무 깊군요. 안면신경 마비가 아니라서 다행입니다만, 여성 정치인의 얼굴에 파인 흉터는 보는 사람을 슬프게 만들 것 같네요. 박근혜 대표의 쾌유를 빕니다.

 

엄마 친구분 중 마당 있는 집에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된 분이 계셨다. 나무와 꽃을 사랑하셨던 그분은 키우던 식물들을 버리는 게 안타까워 엄마에게 말했다.

“우리 집에 와서 몇 개만 가져가라.”

토요일의 시련은 그렇게 시작됐다.


처음에 난 화분에다 꽃이나 좀 담아 오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친구분과 한두번 더 통화를 하신 어머니가 사태가 예상보다 심각한 걸 알아채고 일하는 분을 불렀다. 홍대 앞에서 ‘XX 건축’이란 간판을 내걸고 노가다를 하시는 분인데, 벌써 30년 가까이 우리집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이하 집사). 외모는 무섭게 생겼지만 일 잘하고 인간성도 무지하게 좋은데, 외모 때문인지 벤지는 그분만 보면 열나게 짖곤 했다. 그분이 가니까 난 안가도 되겠지,란 생각에 자는 척을 했는데, 아침 7시 경 엄마가 날 깨운다.

“니가 그래도 가야지!”


화분 몇 개를 트럭에 실을 때만 해도 한시간이면 돌아오겠지, 생각했다.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신 탓에 좀 자고 싶었다. ‘8시부터 3시간을 자고, 운동 좀 하다가 세시에 나가야지.’라는 아름다운 계획. 하지만 막상 그 집에 가보니 이게 아니다 싶었다. 친구분은 꽃이 아닌 나무 비슷한 것들을 가져가라 했고, 버리는 게 아깝다면서 “이것도 가져가야지! 저건 왜 안가지가?”라고 우릴 채근했다. 삽을 마지막으로 들었던 게 언제일까. 군대 훈련 때? 은유적 의미의 삽질은 무지하게 하지만, 진짜 삽질을 마흔이 넘어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집사분과 협력해서 뿌리를 안다치게 나무 여섯그루를 뽑아 우리집에 왔다. 심난했다.

집사: 저거, 화분에다 심으면 다 죽어. 흙이 조금밖에 없는데 어떡해.

나: 그러게요...

집사: (물 받는 용도로 쓰는 커다란 다라이를 보더니) 저런 다라이에다 하면 모를까...

‘다라이’란 말에 난 귀가 번쩍 뜨였다.

“그럼, 다라이를 사면 되겠네요?”

나와 그분은 다라이를 사러 수색까지 가서 다라이 여섯 개를 사왔고, 물이 빠질 구멍을 열 개씩 뚫었다. 근데 다라이를 채울 흙은 어떻게 한다?

집사: 사야지 어떡해.”

나: 아네요, 그집에서 좀 퍼가겠다고 하면 되잖아요!”


우린 푸대자루 스무개를 구해서 그집에 갔다. 흙을 퍼서 자루에 담는 진정한 삽질이 시작되었다. 흙을 푸는 건 좀 낫지만, 30킬로쯤 흙을 채운 푸대를 트럭으로 옮기는 건 진짜 힘든 일이었다. 푸대 스무개가 채워졌고, 트럭은 다시 우리집으로 왔다. 우리집이 있는 5층까지는 엘리베이터로 옮긴다 해도, 거기서부터 옥상은 천상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집사 분이 흙을 채우고 나무를 심는 일을 하셨기에 자루를 옮기는 일은 내 몫이었다. 하나, 둘, 셋.. 스물까지 세는 광경은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여기서 잠깐 우리집 옥상 얘기를 하자. 우리집 옥상을 그동안 가꾼 분은 할머니다. 할머니는 어디선가 스티로폴 박스를 잔뜩 주워왔고, 거기 흙을 채우고 고추와 파 등을 심어 가꾸고 계셨다. 하지만 뭐 하나 버리지 않는 할머니의 성격상 옥상은 무지무지 더러웠고, 상한 음식 같은 걸 갖고 올라가 식물한테 줬으니 거기가 바퀴벌레의 온상이 된 건 당연했다. 스티로폴은 곰팡이가 슬어 더럽기만 했고, 박스의 대부분에선 잡초가 무성했다. 다라이를 사면서 나와 엄마는 올라가기도 싫은 옥상을 이참에 정돈하자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마침 할머니가 주무시기에 잘됐다 싶어 열심히 스티로폴을 부수었는데, 작업 중반 쯤 돼서 할머니가 올라오시더니 화를 낸다.

“이걸 왜 버려? 내가 어떻게 가꾼 건데!”

박스를 막아서는 할머니를 내가 설득했다.

“할머니, 박스만 버리는 거구요, 파랑 고추는 옮겨심고 있잖아요.”

할머니는 결국 승낙하셨다. 곰팡이가 덕지덕지 붙은 스티로폴을 껴안고 안내놓기도 했고, 우리가 버리려던 잡동사니를 어디다 감추시기도 했지만, 결국 옥상은 제법 폼이 나게 바뀌었다. 거기에는 내 공로도 상당 부분 있으며, 내 기억이 맞다면 이건 내가 노가다로 집에 기여한 생애 최초의 일일 것이다.


청소하는 것과 식물에 물 주는 것, 그리고 과일 먹는 일을 가장 하기 싫은 세가지 일로 생각해 온 나지만, 면모를 일신한 옥상에 올라가보니 갑자기 물을 주고픈 욕구가 생긴다. 영양분이 가득한 친구분의 마당보다는 열악하지만, 내가 정성을 쏟고 자주 물을 준다면 우리집 옥상에서도 그 나무들이 꽃을 피울 수 있지 않을까.


* 노가다는 ‘밥심’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점심을 먹고 나니 일하기가 싫어지고, 푸대 자루가 족히 두배는 더 무거워 보였다.


** 노가다를 위해 아무 옷이나 슥 빼서 입었는데, 일하다 보니 메이커다. 재벌 2세의 작은 비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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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5-21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지만 뿌듯하시겠어요

타지마할 2006-05-21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가다를 위해 아무 옷이나 슥 빼서 입었는데, 일하다 보니 메이커다. 재벌 2세의 작은 비애다.^^ - 푸하하하...

Mephistopheles 2006-05-21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의 사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더군요...여성으로써는 빠른 쾌유를 빌지만...
정치인으로는 글쎄요....^^ 노동은.....신성한 것...!! 이라고 하지만....힘들죠...

비로그인 2006-05-21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고생하셨어요. 근데 나무나 꽃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요.ㅎㅎ

마태우스 2006-05-21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찾아서님/많으면 많을수록 물을 많이 줘야하잖아요..^^
메피님/노가다는 정말 힘들더군요. 몸살날 뻔 했다는... 집사님은 60인데도 저보다 훨 힘이 세더이다..
타지마할님/막판에 푸대자루 나를 땐 결국 갈아입고 했어요. 메이커 아닌 거 찾느라 힘들었지만...^^
하늘바람님/그럼요, 제가 가꾼 옥상이니깐요^^

balmas 2006-05-21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런 가슴 훈훈한(아니 등이 축축해지는) 이야기에
추천이 하나도 없다니 ...
추천이오!

플라시보 2006-05-21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 진짜 노가다를 제대로 하셨네요. 흙푸대를 계단으로 옮기다니.. 아 상상만 해도 고관절이 땡기는 기분입니다.^^ 이제 님의 노가다 덕분에 옥상이 환해져서 좋으시겠어요. 할머님도 곧 스티로폴보다 다라이에 적응하실껍니다.^^

moonnight 2006-05-21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은 정말로 정말로 맘이 고운 재벌2세세요. 어머님을 위해 노가다도 마다않다니요. ^^ 힘드셨겠지만 엄청 뿌듯하시겠어요. 멋진 옥상정원으로 가꾸시길 바래요. ^^

프레이야 2006-05-21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잠이 확 깨셨겠어요, 재벌2세의 작은 비애 ㅎㅎㅎ

해적오리 2006-05-21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이 쪼매 빠졌겠네요...^^...
노가다 기념하여 추천..

비로그인 2006-05-21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 참 힘든일이었겠네요. 결혼하셨으면 아내가 토닥토닥 두들겨주고 주물러줬을껄.........어서 그분!과 결론을,,. 재벌 3 세 만드셔야지요^^

2006-05-22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1 2006-05-22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옥상정리가 잘 되서 기분 좋으시겠어요. 후후..

마태우스 2006-05-23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1님/어제 비가 와서 더 기분이 좋습니다^^
캐더린님/그, 그런 거 안만들면 안될까요...
난쟁이해적님/노가다의 가치를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배혜경님/그날 겁나게 피곤해서 다음날 하루종일 잤답니다^^
달밤님/님만큼 고우려구요^^
플라시보님/그러믄요. 인간은 원래 적응의 동물이잖습니까
발마스님/님의 추천은 제게 큰 영광이옵니다

2006-05-23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