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산님이 쓰시는 ‘雜記’ 시리즈를 재미있게 읽다가, 오마쥬 비슷하게 나도 한편 써보고 싶어졌다. 물론 가을산님 것보단 재미가 훨씬 떨어지지만, 그게 바로 오마쥬의 속성이다.
1. 계획성
아직도 전셋집에 산다고, 언제쯤 자기는 집을 살 수 있겠냐고 푸념하는 친구에게 물었다.
나: 너, 로또는 사냐?
친구: 아니.
난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줬다.
“넌 왜 그렇게 계획성이 없냐?”
2. 꽃샘추위
갑자기 한파가 닥쳤을 때, 난 주위 사람에게 말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3월 중에 꼭 한번은 추위가 올 거라고 예견했잖아?”
하지만 예언을 해도 소용이 없는 이유가 내가 워낙 보수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추워도 3월에는 3월에 맞는 복장을 입어야 한다고 믿는 나, 그래서 난 반코트를 입고 가라는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얇디 얇은 봄잠바를 달랑 걸치고 나갔다. 당연하게도 난 그날 덜덜 떨면서 소주를 마셨고, 외박을 한 탓에 다음날에도 이가 딱딱 마주치는 추위와 맞서며 하루를 보내야 했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한겨울에나 볼 수 있는 털가죽으로 무장을 했던데, 그 털이 어찌나 부럽던지.
3. TV
한국과 멕시코전이 열리던 날, 난 느긋한 마음으로 병원 로비에 갔다. 거기서 대형 TV로 경기를 보겠다는 앙증맞은 계획은 나도 모르는 새 TV를 없애고 그 자리에 진단서 끊는 기계를 갖다놓은 병원 관계자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다. 난 분노했다.
“아니 TV가 한 대도 없는 병원이 어디 있어?”
미친 듯이 TV를 찾아 헤매던 난 결국 버스를 타고 고속터미널 대합실에 가서 두시간여 동안 야구를 봤다. 문제는 승객들이 오가면서 유리문을 그냥 열어놓는다는 것. 열려진 문으로 바람이 쌩쌩 들어오고, 가뜩이나 얇게 입었던 난 거의 얼어죽기 직전까지 갔다. 두 번이나 유리문을 닫았지만, 그래봤자 그 다음 승객이 문을 또 열어놓는다.
첫째, 아니 왜 문을 열고 다니는 거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추울 것 같지 않냐?
둘째, 내가 두 번 문을 닫았으면 자기들도 한번쯤 문을 닫아야지, 경기를 같이보던 이십여명의 인간들은 추워하면서도 죽어도 문을 안닫는다. 귀차니즘이 문제다.
4. 반일, 반미
미국와 일본이 야구를 할 때, 무척이나 궁금했다. 과연 네티즌들이 누구 편을 들 것인가가. 반일감정이야 원래 풍부했지만, 근래 들어서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반미감정도 만만치 않기 때문. 이번 야구 월드컵에서 미국이 예선탈락의 위기에 몰리자 신나하는 사람이 꽤 많았는데, 개인적으로도 일본이 미국에게 이겨서 아시아 야구가 이렇게 성장했다는 걸 보여줬으면 했다. 그래도 경기 초반에는 미국을 응원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았는데, 그건 일본이 져야 한국이 4강에 가기가 쉽다는 계산 때문인 듯했다. 하지만 미국 심판의 오심이 있고 나서부터 대세는 단연 일본, 어떤 분은 이런 댓글을 남겼다.
“내 생전 일본을 응원해보기는 처음이다. 나쁜 미국애들...”
잘하는 애들을 다 B조에 몰아넣고 한국, 일본, 멕시코처럼 못하는 나라들이랑만 경기를 하겠다고 우기는 미국애들, 일본에게는 어거지로 이겼지만, 지금 한국에게는 7-1로 지고 있는 중이다. 이정도 스코어 차이면 심판이 끼어들 여지가 없겠지?
5. 망사
내 친구 표진인의 공연-참고로 표진인은 비틀즈 카피밴드를 하고 있다-을 보러 갔다. 작년에 갔을 때는 황우석의 논문이 사기라는 전화를 받은 직후라 공연에 집중할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도 그에 못지않은 악재가 생겨 버렸다. 내 옆에 옆에 앉은 여자가 짧은 치마에 망사스타킹을 신고 앉아 있는 것. 바로 옆이면 민망해서 못보지만 옆에 옆이니 내가 보는 걸 그녀는 알 수 없다. 결론을 말하자면 난 그녀를 거의 보지 않았는데(정말이어요! 믿어주세요), 그렇긴 해도 신경이 쓰여 공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블랑카 식으로 얘기하자면, “공연 때 망사 스타킹 신은 여자 나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