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부 같은 거 싫어해.”라고 근엄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 말해 줬다. 아부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다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거라고.


나라고 아부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승진이 순전히 논문 점수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나같은 사람은 아부 같은 걸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난, 가끔씩 아부를 한다.


하나. 

학장님을 모시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갔다. 가는 길에 거기 가는 선생들끼리 같이 저녁을 먹었는데, 메뉴는 내가 좋아하는 매기 매운탕이었다. 빨간 국물과 더불어 먹는 매기의 맛, 얼마나 환상적인가. 그 집은 더구나 매운탕을 맛있게 잘 끓이는 집이었다.


하지만...학장님 역시 매기 매운탕을 좋아하셨다. 난 학장님과 같은 테이블이었고, 학장님이 “맛있다.”면서 연방 매기를 드시는 걸 보니까 도저히 매기를 먹을 수가 없었다. 난, 국물만 먹었다. 공기밥과 함께. 학장님은 냄비 가득한 매기를 거의 혼자 드셨다. 그 양이 어찌나 많았는지 학장님은 공기밥을 절반이나 남기셨다. 맛있는 것을 난 안먹고 윗사람을 다 드린다면, 그건 아부다.


둘.

토비스 콘도까지 한시간 남짓 가는 동안, 학장님은 웃기는 이야기 몇 개를 해주셨다. 아주 옛날에 들었던, 다 알고 있는 개그였지만, 난 대충 웃어 드렸다. 상대가 웃기려는 시도를 했는데, 웃기지도 않으면서 웃어주는 건 분명 아부다.


셋. 

삼백명 가까이 모인 토비스 콘도 강당. 선생님들 소개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들의 인사말이 끝날 때마다 학생들은 거기까지 와주신 노고에 보답하듯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의예과장을 맡고 계신 xx 선생님이십니다.”

지금까지 나온 박수와 환호를 모두 합친 것보다 세배쯤 많은 박수가 터졌다. 그런 박수를 받으니 쑥스러워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난 인사를 꾸벅 하고, 마이크를 다음 선생에게 넘긴 뒤 들어와 버렸다. 웃음과 더불어 다시금 박수가 터진다. 학장님이 말씀하신다.

“한마디 해야지.”

난 다시금 연단으로 나갔다. 진정한 총잡이는 멍석을 깔아놨을 때 과녁을 맞히는 사람, 내가 프로인지는 모르겠지만 애들의 환호에 답하기 위해 뭔가 강렬하면서도 웃긴 말을 하고픈 마음이 내겐 있었다. 순간 난 의자에 앉은 학장님을 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가 웃기면 안되는 곳이란 생각을 했다. 난 입을 열었다.

“공부 열심히 해서 꼭 본과 갑시다.”

그 자리가 예과생만의 자리가 아니라 본과생들도 상당수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내 말은 부적절했다. 더구나 그 자리에서 그렇게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하다니, 평소 나답지 않았다. 자리에 앉고 나서 난 한참 동안 내 발언이 적절한 것이었는지 생각해야 했다. 높은 분을 의식해 마음에 있는 말을 하지 못하는 건 아부다. 행사가 끝나고 숙소에 들어갔을 때, 저 멀리서 닭 울음 소리가 들렸다. 난 하루 동안 도합 세 번의 아부를 했다.


사족: 그때는 12시쯤이었다. 몸이 너무 피곤해서 문을 잠궈둔 채 소주를 마셨다. 혹시 몰라서 사놓은 동원참치 캔을 안주 삼아서, 그리고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친구 삼아서. 20.1%의 소주는 너무 약했고, 난 한병 반 정도를 마신 후 나머지 절반을 싱크대에 쏟아버렸다. 다음날 보니까 그때 읽었던 부분은 빨간 줄만 그어져 있을 뿐 기억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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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2-27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부는 필요해요...가끔 손바닥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하는 사람들이 문제죠..^^

paviana 2006-02-27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매기 매운탕 맛있으셨겠다.그래도 역시 매운탕은 빠가사리가 최고에요.ㅎㅎ

비로그인 2006-02-27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날 유혹하는 글쓰기 안에 빨간줄 그어놓으신 부분이 어떤 부분인지가 상당히 궁금했었습니다. 저 혼자가 아니었군요.

야클 2006-02-27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한테 아부하는 사람은 필요없고 '아부지~'하는 녀석은 생겼으면 하네요.ㅋㅋㅋ

다락방 2006-02-27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간 줄만 그어져 있을 뿐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하.
가끔 아주 기막히게 멋진 문장을 만들어내시더라구요, 마태우스님은.

LAYLA 2006-02-27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는 아부보단 배려에 가까운거 같은데요 ^.^

타지마할 2006-02-27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기인가? 메기인가? 마태님 아무래도 '메기' 같습니다.

Mephistopheles 2006-02-27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매피스토가 맞나요 메피스토가 맞나요..?

twoshot 2006-02-27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번째와 두번째는 괜찮은데 세번째는 좀 아쉽네요. 다음번에는 가벼운 농담이라도 한마디 하면 좋겠네요.

비로그인 2006-02-27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멀리서 닭 울음 소리가 들렸다. 난 하루 동안 도합 세 번의 아부를 했다..
상당히 여운이 남네요^^;;
근데 세번째는 그렇다 쳐도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아부가 아니라 배려인 것 같아요^^
(사족: 민중서림에서 나온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매기: 수퇘지와 암소가 흘레하여 낳는다는 짐승.^^;;
메기:(어) 메깃과의 민물고기. 길이는 20-100cm, 머리는 편평하며 입이 몹시 크고 네개의 긴 수염이 있음. 몸에 비늘이 없고 미끈미끈한 액이 있음.)

실비 2006-02-27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자기도 원치 않은 아부를 하게 될때가 있더라구여..^^:;;;

moonnight 2006-02-28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모르게 아부-_-비슷한 말 해놓고서 혼자 기분나빠지곤 해요. 실비님 말씀처럼 사회생활 하다보니 가끔은 아부가 필요할 때도;;; 음. 저도 유혹하는 글쓰기에 빨간 줄 그으신 부분이 궁금해져요. ^^ 와와. 그런데 혼자서 참치캔 하나 따놓고서 소주 한병반이라니요. @_@;;;;

stella.K 2006-02-28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걸 아부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냥 겸손하신 걸로 보면 딱 좋을 듯! <유혹하는 글쓰기> 넘 재밌지 않아요? 리뷰 쓰시면 저랑 많이 비교되겠는데요? 마태님 외엔 봐주는 사람도 없어요. ㅜ.ㅜ

클리오 2006-02-28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째로, 메기를 국물만 드신건 아부가 아니라 오바라 봅니다. (^^) 둘째로 웃기지 않는 이야기에 웃어주는건 예의일수도 있지요.(물론 직위가 높은 사람에게만 그런다면 아부입니다만..) 그리고 아부 세번이라, 베드로 못지 않으시군요.. 멋지십니다, 역시... (알아요, 저도 제가 이상한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