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교수 채용 심사를 했다.
교수직을 희망하는 분들 셋이 면접에 임했다.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고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무척이나 초조했을 것이다.
그 중 한분은 비행기값을 써가며 미국서 달려왔다.

면접을 한 세 분 모두 뛰어난 연구업적을 냈고 지금도 내고있는 분들이다.
겨우겨우 논문점수를 채워가며 연명하는 나에 비하면
우리 학교에 임용될 경우 학교 발전에 큰 기여를 하실 분들이다.
나보다 더 뛰어난 분들을 상대로 점수를 매기는 게
그다지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이런 분들이 3대 1의 경쟁을 치뤄가며 교수가 되는 데 반해서
난 18살 때 치른 딱 한번의 시험을 잘 친 덕분에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1대 1의 경쟁을 통과해 교수가 되었고
지금도 교수다.
그 한번의 시험을 나보다 못치룬 사람들 중엔
내가 한 것보다 몇배나 더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나보다-봉급이나 사회적 인정이란 면에서-아래 쪽에 있는 분들이 많이 있을 거다.
오늘 면접에 온 분들도 연구교수' 또는 '책임연구원'이란 애매한 자리에서
SCI 논문을 해마다 서너편씩 내면서
나보다 못한 봉급을 받으면서 애 둘과 아내를 책임지며 산다.
"짧은 인생 재미있게 살자"며 밤마다 술집으로 달려가지만
그런 분들을 생각하면 많이 미안해진다.

매우 진부한 얘기지만
우리 사회에 발전이란 게 없는 이유가
여간해서는 역전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구조 탓이 아닐까?
한번 교수면 영원한 교수라는 게 문제시되어
재임용 제도를 만들긴 했지만
재단에 밉보인 사람이나 입바른 소리를 하는 분들을 제외하곤
그걸로 인해 교직을 떠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마흔몇에 정교수가 되고나면 논문을 한편도 안써도 호봉만 안올라갈 뿐 잘리지도 않는다.

어제, 이런저런 얘기 끝에
올해부터는 정말로 연구를 열심히 하기로 했다.
매우 기특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만
그 속내는 이거였다.
"한 6년만 열심히 해서 정교수 되자."
이런 불순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계속 교수로 있는 것
우리나라 대학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다.
지금도 난 재임용 점수를 맞추느라 머리가 뻐근하지만
사실은
재임용 기준은 좀 상향되어야 한다.
최소한 20% 정도는 탈락자가 나와야 취지에 맞는 거 아닌가?
그리고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정교수는 안잘린다는 룰도 바뀌어야 하고
교수 정년도 좀 낮출 필요가 있다.
60이 넘어서도 왕성한 연구를 하는 분을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신 보다 많은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

대체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뭘까?
그렇게 될 확률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런 글이라도 쓰면 양심적인 학자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글 쓰고 다시금 놀려는 음험한 기도에서
답은 all of the above다.
내가 있는 자리가 과분하고
내가 정말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진작에 사표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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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돌이 2006-01-06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학교 다닐때 지금처럼 책을 봤으면 이렇게 살지 않을텐데요. ㅠ.ㅠ 역전의 허용하지 않는 사회라는 말, 아프게 다가옵니다.

Mephistopheles 2006-01-06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많이 겸손하신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 글이네요...

paviana 2006-01-06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ci논문을 해마다 서너편씩 내는 분들(!)이 몇분이나 오신겁니까? 대단하네요.

하늘바람 2006-01-06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그런 경우는 어디다 다 통하는 것같아요. 가끔 반대의 경우도 보긴했어요 박봉에 죽어라 노력했는데 우연히 지원했다는 새내기 신입이 더 많은 월급을 받을때.

2006-01-06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6-01-06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분/고맙습니다. 방금 고쳤습니다.
하늘바람님/음, 그런 경우도 있군요. 하긴 제 후배가 규정이 바뀌는 바람에 조교수 받고 우리학교 왔는데 전 전임강사로 있었다는..
파비님/뭡니까 알라딘 하시면서 전화도 안받고...업무상 연락이라구요!!
메피님/겸손이라기보단 솔직한 글이죠^^
웃는달님/웃는달님이 계속 웃으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Mephistopheles 2006-01-06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백합니다 심신이 피곤하다 보니...SCI....를 CSI로 잘못 봤군요...

아영엄마 2006-01-06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헷~ 저처럼 SCI를 CSI로 본 분도 계시군요..^^;;

라주미힌 2006-01-06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CV로도 보이네요... ㅎㅎ
마태우스님 6년후에 노벨상 기대해도 되겠죠 ^^

아.. 분야는 노벨 문학상입니다...

2006-01-06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06-01-06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역시 마태님은 지나친 겸손쟁이시란 의견에 동감. ^^; 조금 더 운이 좋으셨을 수는 있지만 엄청 노력하셨던 것도 맞으실텐데. 느무나 천재시라 전혀 노력없이 오늘을 이루셨다면.. 흑. 존재조건은 다를 수 밖에 없단 말을 떠올리며 잠깐 슬퍼하는수밖에요. ^^; 늘 자신이 너무 많이 가진 거 아닌가 고민하시는 마태님의 고운 마음에 추천입니다. ^^

마늘빵 2006-01-06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겸손하세요. 근데 이런 말을 윗사람들한테 했다간 '입바른'소리했다고 잘리는거 아니에요?

로쟈 2006-01-06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초 대담에서 학계의 한 원로께서는 대학사회의 '위기'에 대해서 80년대 초반 (선심성 정책에 따라) 우후죽순 대학이 들어서면서 자격미달의 석박사 학위자들이 대거 교수직에 임용된 사실을 원인으로 들더군요(지금은 별따기가 됐지만). 이 분들의 다수가 이제 50대 후반으로 대학의 원로들입니다. 마태우스님의 겸손은 '원로급'의 겸손 같습니다...

호랑녀 2006-01-06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18세때 시험... 그거 좀 잘 봤더라면 제가 좀 다를까요?
그 시험 잘 봐서 다니는 학교 출신 중에 마태님처럼 생각하는 사람 참 드물어요. 대부분 자기들은 좀 다르다고 생각하죠.

모1 2006-01-06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쟁률이 1대 1이셨다구요? 와....정말 운이 좋으셨네요.(아, 아닌가요? 교수님 되기 힘들다고 들어서요.) 참..그런데 정교수 되고 나면 나중에 명예교수되려고 참 열심히 노력하시더군요. 명예교수는 뭔가 틀린가 보더라는...(모든 정교수가 다 명예교수가 되는 것은 아닌듯 해서요.)

2006-01-06 1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깍두기 2006-01-06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이 저랑 안놀아주면
제가 대학당국에다 마태님 짤르라고
맨날 미녀랑 술만 마신다고 꼬발라야지~~~~
그러니까 노라조 노라조~~~~~!!!
=3=3=3

쪼코케익 2006-01-06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정말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진작에 사표 냈다."
저도 같은 형편인데...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마태우스 2006-01-20 0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레네님/어머 님도?? 같은 고민을 하는 분이 있다니 반갑습니다. 전
깍두기님/무슨 말씀...마음은 늘 깍두기님 곁에 있는데요??? 글구 대학당국에 꼬발리시면 말입니다, 자기들도 끼워달라고 하지 않을까요??
속삭이신 분/ 저도 님이 좋습니다. 님도 뭐, 한솔직 하시잖습니까.
모1님/1대 1이였던 이유는 자격조건을 MD(의대출신)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명예교수는...미련이 남아서 하는 거죠. 우리 세대에는 없어질 겁니다.
호랑녀님/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러는 거죠 뭐. 저도 한탄만 할 게 아니라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데, 사실 제가 능력이 별로 없다는 걸 알게 되니까 기운이 빠지더라구요.
로쟈님/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외형적인 것만 따져서 교수를 뽑는다면 내실을 보지 못하는 단점이 있답니다.
아프락사스님/하핫,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마, 말이 씨되는 건 아닌지...
달밤님/제가 천재라는 소리가 아니구요, 제가 그래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공부 엄청 열심히 했거든요. 그 이후에 이십년을 놀아 왔는데 거기에 대한 견제 장치가 없다는 애기예요. 몸은 만들고 계신가요?
속삭이신 분/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춤법 틀린 것도 고칠게요.
라주미힌님/노벨 알라딘상은 안될까요??
아영엄마님/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문자를 써서요....
메피스토님/심신이 피곤한 분께 제가 너무도 큰 결례를 했습니다. 흑, 죄송합니다. 한번만 봐주세요, 네???

2006-01-19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