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은 애들의 우상인 것 같아.”
남동생이, 큰아빠가 보고 싶다고 우리집에 가자는 조카를 언급하며 한 말이다. 실제로 난 애들하고 무지하게 잘 놀아준다. 남동생 애 뿐 아니라 누나 애들도 나만 보면 좋아서 난리다. 벤지가 살아 있을 때는 벤지랑 애들이 서로 나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난감한 상황이 늘상 벌어졌다. 하지만 체력적인 문제로 두시간 이상 놀아주는 걸 꺼렸고, 몸이 좀 피곤할 때는 애들이 왔을 때 밖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그때 했던 생각은, 아이들을 낳아서 키운다면 하루종일 애를 봐야 하는데, 어떻게 매일 그러고 사느냐 하는 거였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난 애들을 낳아 잘 키울 자신도 없었고, 그들과 매일 놀아주는 걸로 내 인생을 보내고픈 마음은 없었다. 최소한 내게는, 부성애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모성애(부성애)에 대해 난 부정적인 편이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모성애를 강조했던 것처럼, 모성애를 강조하는 데는 모종의 계산이 있다고도 생각했다. 실제로 중세 귀족들은 유모에게 애 보는 걸 전담시키고 자기는 놀러만 다녔지 않는가? 내가 낳지도 않은 벤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처럼, 꼭 자기가 낳아야만 애정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내게도 모성애가 존재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난 식물에게 물을 주는 걸 싫어한다. 옥상의 식물들에게 물을 줘야 했던 지난 몇 년간, 난 그게 귀찮아서 죽을 지경이었다. 옥상에서 더 이상 고추와 가지를 키우지 않게 되었을 때 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얼마 전 엄마가 김장할 때 남은 파를 화분에 심으라는 말에 기겁을 했다.
“아이 참, 파를 왜 심어? 그냥 놔두지.”
“좀 심어라. 네가 안하면 내가 해야 한다.”
“어떻게 심는 건데?”(이건 웬만하면 안해보려고 한 질문이다).
“호미로 땅을 파고 파를 심은 다음 흙을 덮으면 된다.”(이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무지하게 귀찮았지만 난 옥상에 올라가 파를 심었다. 하도 엉성하게 심어서 저게 과연 자랄까 의심이 가기도 했다. 자발적으로 물도 줬다. 첫날이니까.
하지만 그 다음부터, 난 내가 심은 파가 잘 있는지 확인하러 옥상에 자주 가게 되었다. 심지어 물도 가끔씩 줬다(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물을 자주 안줘도 된단다). 내 정성 때문인지 처음 심을 때보다 파는 더 푸르러진 느낌이었다. 저렇게 대충 심었어도 정착을 한 것에 대견한 마음도 들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그동안 고추에 물주는 걸 귀찮아한 이유는 그걸 내가 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고추들은 할머니가 지금보다 정정하시던 시절, 봄이 될 때마다 심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내 손으로 심은 파한테는 자발적으로 물도 주고, 괜히 가서 잘 있는지도 들여다보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내게도 부성애가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남의 애는 일주일당 두시간이 한계지만, 내가 직접 낳은 애라면 하루종일 놀아주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물론 이 깨달음이 곧장 자손의 생산으로 연결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