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일기를 너무 오래 안써서 숫자도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놓은 게 있으니 언제한번 싹 정리를 해야겠네요.


학회날 술을 마셨다. 그런 데 가면 보스를 모셔야 하지만, 나도 좀 많이 컸다고 생각하기에 슬쩍 빠져나와 대전서 개업한 친구와 술을 마셨다. 2차를 하고 보스의 모임에 합류했지만 12시가 지난 시각이라 보스는 이미 들어간 뒤다. 다음날 만난 보스는 내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어제 안보이대?”

“네..그, 그게요...”

학회 내내 날 보는 싸늘한 눈길을 보면서 난 아직 덜 컸으며, 크려면 멀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부터 하는 얘기는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들은 거다.


40대 여자가 목에 뭐가 생겼다고 친구 병원을 찾았다. 보니까 과연 동그랗게 생긴 뭔가가 있다. 생판 처음 보는 거라 고민을 하던 친구, 그냥 확 떼어버리고 보낼까 하다가 찝찝한 마음에 이렇게 말했다.

“큰 병원에 가서 조직검사를 해봐야겠네요.”

나중에 그 여자는 친구 병원에 다시 왔다. 충대병원서 CT를 찍어보니 뇌종양이 발견되어 치료를 했다고. 목에 생긴 것은 뇌종양이 전이된 결과였다.

“제가 암인줄 어떻게 아셨어요?”

여자는 거듭 고마움을 표시했지만, 친구는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냥 떼어내고 환자를 집에 보냈다면 그 자리는 환자 가족들에 의해 멱살을 잡히는 자리였겠지만, 자신의 직감에 충실했던 탓에 감사인사를 받았으니 말이다. 뇌종양이 그렇게 전이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데, 친구가 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 실력이리라. 대전 시내만 해도 많은 이비인후과가 있고, 그 환자가 내 친구보다 실력이 못한 병원을 찾았다면 그녀의 운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또 다른 환자. 나이가 좀 드신 할아버지가 코피가 났다. 대충 치료해주고 보냈는데 한참 후에 다시금 친구를 찾아왔다. 뇌종양으로 방사선치료를 받는데 그 과정에서 목에 문제가 생겨 A/S를 원한 것. 뇌종양? 친구는 처음에 그 할아버지가 따지러 온 줄 알았다. 하지만 며칠을 치료받는 동안 할아버지는 그런 불만을 표출하지 않았기에 마음이 어느정도 진정된 친구는 자기 병원에 왔던 걸 기억하냐고 물었다. 그 할아버지의 답변.

“의사 선생님이 그때 치료해주면서 한번더 코피가 나면 큰 병원에 가라고 하셨는데요, 그로부터 사흘 후에 다시 코피가 나서 대학병원에 갔어요.”

할아버지는 거기서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코피는 대부분의 코피처럼 코 속의 혈관이 터져 난 게 아니었고, 그보다 더 깊은 부위, 즉 뇌종양에서 나온 거였다. 그제서야 친구는 자기가 그 말을 했던 걸 기억해 냈다. 친구 말에 의하면, “식은땀이 났다.”


의사가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인 이유는 이렇게 환자의 운명을 바꿔줄 선택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리라. 의사가 여럿 있는 종합병원과 달리 개업의는 그 선택을 혼자서 내릴 수밖에 없다. 일견 생각하기엔 잘 모를 때마다 “큰병원 가세요.”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단순한 코피를 가지고 큰 병원에 가서 CT나 MRI 등의 검사를 해야 했던 환자가 또다시 그 의사를 찾을까? 그러니 큰병인지 아닌지만 분간할 수 있으면 좋은 의사라는 건 괜한 소리가 아니다. 개업의 뿐 아니라 큰병원이라 할지라도 까운을 입은 임상의사라면 그런 선택의 순간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터, 환자에게 친절하게 할 자신만 있는 내가 기초의학의 길을 택한 건 참으로 잘한 결정이리라. 의사 뿐 아니라 환자가 어느 병원을 선택하느냐도 자신의 운명에 중요할 수 있는데, 좋은 의사를 구분하는 한가지 방법은 개업한 지 최소한 3년은 지난 병원을 택하는 것이다. 3년간 한 지역에서 별탈없이 진료를 했다면 그래도 믿음은 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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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5-10-30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사춘기때 나고 한 동안 안나던 '옥에 티'(일명 여드름)가 이마에 한개 났어요.
또 나면 큰 병원을 찾아야 할까봐요. -_-a

moonnight 2005-10-30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치료받다가 한동안 안오시던 환자분이 다시 오셨어요. 그 분은 사진을 찍었다가 우연히 하악골에 커다란 낭종이 생긴 걸 발견하고 대학병원으로 consult를 냈는데 시간이 없어서 안 가셨다더군요. 다시 사진을 찍어봤는데 수년간 변화없이 그대로여서 일단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대학병원은 약속이 너무 밀리고 살기 바빠서 도저히 못 가겠어요. 그냥 계속 여기서 치료해주세요. 라고 저를 쳐다보시니 이를 어쩌나의 심정입니다. -_-;; 메디컬 닥터보단 확실히 덜하지만 어쨌든 누군가의 몸에 대해 대신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 늘 고민스러워요. ㅠㅠ

하루(春) 2005-10-30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좋은 술일기인 것 같네요.

마태우스 2005-10-30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하루님! 이런 과분한 칭찬을!!! 감사합니다 꾸벅.
문나이트님/음, 그런 일도 있군요. 님 빽으로 예약 잡아주시면 좋겠지만 환자마다 그럴 수야 없구, 흠, 그것 참...
야클님/이마에 여드름까지... 제가 야클님을 외모로밖에 이길 수 없단 거 아시죠?^^

가시장미 2005-10-31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자의 운명을 바꿔줄 선택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리라. ->흠. 그렇지....형. 자랑하고 싶어서 올린 페이퍼구나? 이거이거 의사아닌 사람 서럽게. ㅠ_ㅠ 그런거 아니라는거 알아. ㅋㅋ 일요일에, 오랫만에 올라온 페이퍼라 참 반갑네!

예전에 닥터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어. 아주 계산적으로 인간관계를 대하듯 환자를 대하던 의사가 자신이 환자가 되어보니, 그 계산적인 인간관계에서 느껴야 하는 씁쓸함이 얼마나 환자를 서럽게 하는지를 깨닫게되지. 그래서 어렵게 어렵게 자신의 병을 치료하고 다시 의사로 돌아왔을 때는 환자를 마음으로 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해. 인턴들을 교육할 때도 그런 식의 프로그램을 도용하여 환자를 마음으로 대하는 의사가 많아 질 수 있도록 힘을쓰면서 아주 아름다운 마무리를 보여주었지.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하지만 막상 입장을 바꿔보면 자신이 본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되는 것 같아. 남의 일에는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는 있지만, 자신의 일에는 객관적인 시각을 갖기가 힘들잖아. 만약 의사가 환자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계산적인 태도는 보일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런 태도를 가진 의사들은 정말 많더라. 우리 어머니가 암수술을 했을 때도 그런 것을 뼈져리게 느껴야 했었어. 모른다는 것이 갖지 못했다는 것이 죄는 아닌데말야. 세상에는 참 그런 것이 죄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그 일 후에 우리언니는 직장을 그만두고 공부를 다시해서 간호대를 갔어. 그래서 지금은 간호사로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어. ^-^

언니에게 내가 물은 적이 있어. 간호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정말 화나고 짜증나게 만드는 환자들이 없냐는 물음에 언니는 이렇게 대답해줬어. 아파서 그러는 것이라고. 엄마가 아프셨을 때 그랬던 것처럼 아파서 하소연하는 사람들을 보면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그래서 환자들을 대할 때 엄마를 대하듯이 대한다고..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 언니가 그렇게 이뻐보였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야. ㅋㅋ

형의 글을 보면 늘 어머니와 할머니를 생각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느낄 수 있었어. 난 그래서 생각했어. 형은 의사라는 직업을 갖기에 정말 어울리는 사람이구나. 정말 환자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겠구나.. 하고. 형의 책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 정말 많이했어. 단지 내집단에 속하는 사람이여서가 아닌 외집단의 사람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갖는다는 것이 절대 쉬운일이 아닌데. 형의 책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을 많이 느낄 수 있었어. 그래서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다고. 형의 책을 봐달라고. 아주 따뜻한 의사선생님이 쓴 책이라고. ^-^

근데 말야. 꼭 신체의 어디가 아픈 사람만을 따뜻하게 대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다 상처를 가지고 있으니깐. 모두가 환자 인지도 몰라. 사실 난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안으로 안으로 아픔과 상처가 많은 사람이거든. 그 아픔과 상처를 감추기 위해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씩씩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그런 부분이 나의 마음에 그늘로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야. 그래서 난 밝지만 아주 어두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서글퍼질 때도 많지.

환자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 아니 인간을 생각하는 따듯한 마음으로 이 곳의 많은 이웃에게 보내는 손길도 아름다웠으면 좋겠어. 내 마음이 잘 전해졌으면 좋겠는데..............
오랫만에 형이 남겨준 글에 헛소리만 늘어 놓은 것 같네. ㅋㅋ 내 마음 알아주리라 믿어요~


가시장미 2005-10-30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제가 너무 길게 써서 더이상 댓글이 안올라오나봐요. 어머어머~~
~(_-_)~(-_-)~(_-_)~ 한바퀴돌고 애교부리기. 죄송해요. 댓글의 흐름을 끊어서. ㅋㅋ

모1 2005-10-30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동네에 오래된 병원 있는데...동네에서 몇미터씩 건물을 옮겨다니거든요? 의사가 좋다..잘한다..하는데.. 여러사람 진단 잘못해서 안 좋은 결과를 냈었다는 소리가 있어요. 그 의사선생님 노인들이나 아이들에게 친절해서 동네의 다른 병원은 잘 안되도 그분 병원은 아주 잘되죠. 갑자기 그분이 생각납니다. 저희 집 단골병원이기도 하다는..

merryticket 2005-10-31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동네 가정의학 병원의 기본이 52000원 이에요..보험으로 2/3는 커버되지만..
(웬 뜬금없는 소리람~)

클리오 2005-10-31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사가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인 이유는 이렇게 환자의 운명을 바꿔줄 선택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리라' --> 저 같으면 이 이유로는 의사를 기피하고 싶을 것 같은데요. 생명에는 지장없는 교사만해도 두려운데 의사는 얼마나 더할까요...

마태우스 2005-11-01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선망'이란 얘기 쓸 때 더 좋은 표현이 없을까 고민했었어요. 역시 문맥에서 어긋난..... 굳이 우기자면 중요한 결정을 내린단 얘기는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단 소리니까......
올리브님/아 네.... 기본이 5만2천원이면 3분의 2가 커버되도 17천원은 된단 말이군요
모1님/진단 잘못했는데도 잘된다니, 친절하다 해도 그건 좀 이상합니다..
장미/누구나 상처가 있으니 다들 잘해줘야 한다는 말 새겨들을께. 페이퍼보다 더 훌륭한 댓글,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