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일요일, 엄마가 내게 이러신다.
"미자(가명) 언니 기억나니? 오늘 우리집에 온단다"
엄마 말씀에 난 이렇게 대답했다.
"그 돈 떼먹은 언니 말하는 거야?"
우리가 화곡동에 살 때, 옆집에는 미자 언니가 살았다. 20대였던 미자언니는 종종 우리집에 와서 일을 거들어주곤 했다. 붙임성도 좋은 편이었기에 우린 미자 언니를 잘 따랐다. 우리랑 같이 놀러도 가주고 그랬던 그 언니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은 '돈 떼먹은 언니'로만 기억나는 건 왜일까?
그 언니와 엄마가 돈거래를 시작한 건 알고 지낸지 몇년쯤 지난 뒤였다. 돈을 빌려주면 정해진 날짜에 얼마씩 갚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언니는 처음 빌려준 돈을 다 갚았던 것 같다. 그리고는 액수를 올렸다. 그 돈을 빌려가던 언니의 얼굴에서 왠지 불신감이 느껴졌다. 그 이후 언니는 우리집에 오지 않았다. 나중에 엄마가 전화통을 붙잡고 "미자야--니가 어떻게 그럴 수가!"를 외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엄마가 우는 걸 보면서 난 미자언니가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 돈은 엄마가 생활비를 아껴가며 모은 전재산이었고, 액수는 200만원에 달했다. 그때가 70년대 말-78년?-이니 지금으로 따진다면 2천만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 미자언니가 우리집에 온단다. 돈 떼먹은 언니라는 내 말에 엄마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고 하신다. 사실 나도 그 언니에게 큰 감정은 없다. 내 돈이 아니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 후 이십여년을 살아가면서 세상 경험을 많이 한 덕분이다. 돈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착했던 사람이 변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 언니 또한 나쁜 마음으로 그런 것만은 아니었을 거다. 보다 중요한 건 그 언니가 나중에 우리집 연락처를 수소문해서 전화를 했다는 사실이다. 돈을 갚을 목적이든 아니든, 용서를 구하는 건 아름다운 일 아닌가.
세월이 흘렀지만 난 언니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모양을 한껏 낸 언니는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그때의 남편과는 이혼을 했고, 나이가 넉넉한, 그리고 늘 웃는 표정의 남편과 재혼을 했다. 지금은 신림동에서 고시원을 경영할 정도로 성공한 상태. 억척스러운 면이 있는 미자언니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때 미자언니는 엄마한테 잘못을 빌었고, 그 다음 방문 때-그땐 내가 없었다-빌린 돈을 갚았다. 원금 200만원과 이자 100만원. 미자언니가 아무리 성공했다해도, 자라는 아들이 둘이나 되는 그 언니에게 300만원의 돈을 갚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척박하다 해도, 가끔씩은 좋은 일이 생긴다. 세상을 각박하게 만드는 게 사람의 힘이듯, 가끔씩 생기는 좋은 일도 다 사람 때문에 생긴다. 뒤늦게나마 용서를 빌고 돈까지 갚은 그 언니가 난 참으로 고맙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