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7월 5일(화)
누구랑: 친구랑
마신 양: 코가 비뚤어지게
PD를 하다 그만둔 내 친구, 갑자기 한의대를 간다고 수능공부를 한다. 공부를 하는 거야 좋은 일이지만 수학이랑 과학 문제만 나오면 내게 전화를 해서 괴롭혔다. 그거 안본지가 몇십년인데 내가 어떻게 대답을 해주겠는가? 3년 떨어졌을 때는 “만성적으로 수능만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덜컥 들었지만, 작년에 부산의 모 약대에 합격을 했다. 실로 인간승리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나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많은데 대학생활은 잘 할까 싶었는데, 세상에 1학기 평점이 4.04란다. 정말 대단하다!! 중년의 나이에 삶을 새출발한다는 건 참 어려운데, 그래도 이 사람은 그걸 하고 있다. 4년 후면 어디선가 약국을 하고 있겠지. 마흔다섯의 약사, 그리 늦은 것도 아니다. 새출발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가 미혼이기 때문, 아내와 자식이 있었다면 PD란 좋은 직장을 때려치우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와 헤어져 집에 오다가 차 밑에 있는 다리다친 고양이를 봤다. 날 보고 야옹 하고 운다. 마음이 아팠다.
벤지가 살아있을 때, 난 벤지가 남긴 밥에 우리집 밥을 합쳐서 그 고양이의 아침을 매일같이 먹였다. 다리를 다친 그 녀석만 오면 좋겠지만, 다른 놈들이 밥그릇을 점거해 녀석은 그들이 다 먹고 나가기를 지켜보곤 했다. 고양이 때문에 동네에서 욕도 먹고 그랬지만 난 계속 아침을 줬다. 내가 줄 의무가 있는 건 아니었는데, 고양이들은 나만 보면 밥 달라고 야옹야옹 울곤 했다. 당연히 받아야 할 빚을 받는 것처럼.
벤지가 죽은 다음날부터 난 그들에게 밥을 주지 않았다. 벤지 밥을 안만드니 그들에게 줄 건덕지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을 야옹대던 고양이들은 결국 어디론가 갔고, 우리집 앞에서 고양이는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한 녀석, 다리를 다친 그 고양이는 이따금씩 우리 차 밑에 웅크린 채 나를 기다렸다. 그걸 보니까 마음이 아파서, 지난 주 어느날엔 나가다 말고 집에 들어가 국에다 밥을 말아가지고 고양이에게 줬다. 그 다음날 아침, 우리집을 떴던 고양이들이 다 모여 있는 걸 보고 놀랐다. 이것들이 서로 연락을 하나, 어쩜 이리 귀신같을까.
그 뒤 고양이들은 발길이 뜸하던 차였는데, 집에 오는 길에 그 녀석을 다시 본 거다. “밥은어떻게 먹니?”라는 내 질문에 경계하는 눈빛을 보낸다. 아침을 주던 시절, 다 먹고나서 입맛을 다시고, 기지개까지 켜던 그 녀석들, 그들은 이제 뭘 먹으면서 하루를 보낼까. 비는 어떻게 피하며, 물은 어떻게 구할까? 다리를 다친 고양이는 내 생각처럼 교통사고가 아니라 가게집 아저씨가 두들겨 패서 그리 된거라 한다. 세상의 인심은 고양이에게 이렇듯 적대적이다. 고양이 밥을 줄 때 우리 동네 사람들이 내게 항의를 했던 것처럼. 세상이 그리 각박해도 질긴 생명은 그들로 하여금 오늘도 음식을 찾아 거리를 헤매게 만든다.
식사가 불규칙하고 추위를 이길 곳도 없는지라 거리의 고양이들은 기껏해야 3-4년 사는 게 고작이란다. 하지만 다리를 다친 그 녀석을 본 건 벌써 5년째, 오래 사는 건 대견하지만 그들에게 밥을 주지 못하는 게 미안하기만 하다. 그들을 보면서 느낀다. 몸을 누일 곳이 있고, 배고픔을 해결할 음식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거기다 여자까지 바란다는 건 고양이들이 보면, 호강에 겨운 소리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