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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술집들이 몰려 있다는 점은 다른 유흥가와 다를 바 없지만, 대학로 카페들의 이름은 그래도 운치가 있었다. 꼴초 시인을 생각하게 만드는 <오감도>, 유명 작곡가와 그의 아내 이름을 딴 <슈만과 클라라>, 그 안에서는 고상하게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은 <학림> 등등. 그리고 <조르바>라는 카페가 있었다. ‘닭 한 마리’가 유명했던 그 카페, 가격이 만만치 않아 두 번밖에 가보지 못했지만 내가 조르바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카잔차키스의 소설이 아닌, 닭이 맛있는 카페를 통해서였다 (지금은 없어졌다).
조르바를 안 지 십팔년이 지난 뒤에야 책을 손에 쥐었고, 다 읽었다. 명성이 높은 작품은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헷갈려 리뷰를 쓰기가 꺼려진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막가파식 리뷰를 써 본다. 내가 언제 완전히 이해하고 리뷰 쓴 적 있는가.
1) 섹스
조르바는 과부를 꼬셔서 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하지만 젊은 과부 하나는 건드리지 않고 남겨 두는데, 그건 두목을 위해서다. 그는 두목에게 “한번 하세요”를 끈질기게 독려하고, 두목 역시 그녀를 그리워하며 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다. 그렇다고 그 과부가 두목을 좋아하지 않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렌지를 선물한다든지, 집으로 들어와 문을 열어놓고 두목을 기다린다든지 하는 행동으로 보건데 그녀 역시 두목에게 마음이 있다. 단지 여자라서 “합시다”란 말을 못할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목은 허벅지를 꼬집으며 욕망을 참아낸다. 책에 나아갈 바가 다 있다고 믿는 두목과 모든 것은 현실에서 부닥쳐 가면서 배워야 한다고 믿는 조르바, 책을 읽으면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 “해! 하란 말야!”라고 중얼거려 가면서 책을 읽는 독자가 나 하나 뿐이었을까? (아마 그럴지도..) 다행히 두목은 결국 조르바의 철학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녀와 한다. 하고 나서 포만감에 젖은 두목, 이렇게 좋은 걸 왜 참았을까 후회했을 거다. 책을 통해 진리를 얻는 기쁨도 중요하지만 현실에서 얻는 기쁨도 만만치 않은 법이다.
2) 다시 책.
아까 한 말의 연장이지만, 조르바는 책만 읽고 사는 두목을 못마땅해 한다. 사람은 왜 죽는가에 대한 질문을 한 뒤 이렇게 말한다.
“아니 두목, 당신이 읽은 그 많은 책 말인데...왜 읽고 있는 거요?...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50톤 씹어삼켰을 테지요. 그래서 얻어낸 게 무엇이오?”
모르긴 해도 책벌레였을 카잔차키스가 책에 대해 이렇게 회의하는 이유는, 순전 내 생각이지만, 터키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데 있어서 책이 별반 소용이 없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우리 민족에게 이광수의 소설보다 안중근 의사의 총알 몇발이 더 큰 카타르시스를 준 것처럼, 어떤 경우에 책은 한없이 무력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그 ‘어떤 경우’냐는 것.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책을 별로 읽지 않으며, 술값으로 나가는 몇만원보다 책 한권 값을 훨씬 아까워한다. 책을 곱게 안읽으면 뭐라 안하겠지만,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혹은 우리집에 와서 쌓인 책들을 보면 꼭 빌려달라고 한다. 그 책들의 대부분은 읽히지 않으며, 더 안타까운 것은 내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