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로서 마지막 예비군 훈련을 마쳤다. 6년간 쌓인 노하우는 시키는대로 다 하면 손해라는 거다. 휴대폰을 맡기라고 해서 맡겨선 안되며, 책 같은 걸 가져오지 말라고 한데서 그냥 가면 멍 하니 있어야 한다는 것. 어제 아침 무슨 책을 가져갈까 고민하다가 군복 바지주머니에 딱 들어가는 크기의 <만년>이 선택되었다. 어느 분한테 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산 건 아니다(혹시 판다님?). 다자이 오사무, 그의 작품을 읽은 적은 없어도 이름은 많이 들었다. 그래, 이 책을 읽자.


‘북한이 우리보다 잘살았는데 그게 70년대에 역전이 되었다. 그건 공산주의에 대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밤낮 이런 헛소리로 시간을 죽이는 강사를 외면한 채, 나는 <만년>의 재미 속으로 흠뻑 빠져들..... 뻔했다. 하지만 책 곳곳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문장이 보인다.


-저 역시 ....애조 띤 가락에 넋을 잃곤 하던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잃곤 했습니다

-사람은 모두 죽어서는 안된다는 과학적인 뭔가 이유라도 있기나 한가 말야-->“뭔가”가 뭔가?

-배우지 못한 엄마는 우리를 난로 곁으로 불러다 교훈을 했다-->배우지 못한 번역가는 교훈을 한다.

-남자는 사포에 대한 책을 읽고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사포는 미인이 아니었다-->난 <만년>을 읽다가 짜증이 났다. 그런데 번역이 엉망이다

-한집 건너 이웃의 구멍가게에는 책 같은 것도 조금 팔아 어느날 나는 거기서 부인 잡지의 그림 등을 보다가 그 중 노란 인어 그림 수채화가 몹시 갖고 싶어서 훔치려고 생각하여 조용히 잡지에서 뜯고 있었는데 그곳의 젊은 주인이 오사코, 오사코 하고 야단쳐서 그 잡지를 소리나게 가게의 다다미에 내던지고 집까지 달아난 적이 있지만 이러한 실패가 또한 나를 아주 잠못들게 했다--> 그야말로 비문의 극치다. 이 문장은 비문도 극에 달하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또한 아주 잘 명백히 보여준다. 외국어에서는 부사가 병렬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또한 아주”로 번역해서야 되겠는가.

-우리 동네에는 기차가 없었기 때문에 3리 정도 떨어진 기차가 있는 시와 왕래하는 데에 여름은 마차, 겨울은 썰매, 봄눈이 녹을 무렵이나 가을에 진눈깨비가 내릴 때는 걷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이거 꼭 이렇게 써야만 했을까?

-나는 욕정이 강해서 힘껏 그것을 억누르며 여자에게도 매우 겁쟁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책을 집어던지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겁쟁이 예비군이 되어 있었다

-나는 먼 학교로 매일 걸어서 다닌 덕분에 몸도 뚱뚱해졌다--> 나는 오역으로 점철된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걸 느꼈다.

여기까지 읽고 난 책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50여페이지 동안 이렇듯 많은 비문이 쏟아져 나오는데, 앞으로는 얼마나 더 말이 안되는 문장이 많을까? 난 잡담으로 남은 시간을 떼웠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비문을 싫어한다. 얼마 전 페이퍼를 쓴 뒤 비문이 발견되어 그걸 고치기 위해 근 30분 동안 ‘수정’을 시도했었다 (물론 실패는 했지만). 작가도 아닌 내가 인터넷에 올리는 글에도 이렇듯 신경을 쓰는데, 유숙자라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따위 번역을 턱 하니 내밀었을까. 출판사 직원들은 교정도 안본 걸까? “나는 오로지 이 책 한권을 만들기 위해 태어났다...<만년> 한권이 ...거듭 애독될 것을 생각하면 아아, 나는 행복하다”라고 말한 다자이 오사무가 이 책을 봤다면 편히 잠들지 못했으리라. 오역은 범죄다. 독자에게도, 그리고 작가에게도.


* 유숙자는 책 말미에 이런 말을 한다.

“다자이의 창작은 현실과의 접촉을 시도하려는 자기동일화의 노력이며 그 과정에 벌이는 자의식과의 치열한 전투장에 다름 아니라 하겠다”

이 문장도 지극히 맘에 안들긴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줬으면 좋겠다. 작가가 그렇게 치열하게 글을 썼으면, 번역을 할 때도 비문과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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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겐 2005-05-27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역, 오타 ...이런것들은 글을 읽을때 짜증을 불러 일으킨다지요...저는 지난번에 이런걸 출판사에 메일로 보냈는데 답변이 황당했었어요...다른 어떤분도 이것을 가지고 뭐라 하시는 분이 없다나요... 이후론 그 출판사 책 안봐요...

인터라겐 2005-05-27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런데 아직도 예비군 훈련을?......

토토랑 2005-05-27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마태우스님 질문이요~~

'같은 것도 조금 팔아 어느날 나는 '  이 부분은 어떻게 고쳐야 비문이 안되는 건가요? 사실 제가 말을 쓸때 이렇게 쓰는 일이 종종 있는거 같거든요. 방금까지 이게 비문인지 몰랐어요 ㅡ.ㅜ  한수 가르침을 내려주시어요~


비로그인 2005-05-27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외국어 좀 한다고 아무나 번역하는 거 아니지요......

비로그인 2005-05-27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할 말 없습니다. 맘 먹고 제가 쓴 글을 찬찬히 훑어보면 (정말) (엄청난) 비문들이 눈에 띄더라구요. 관형사가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자주 위치해 있고 특히 불필요한 접속어를 남발해요. 예전엔 귀챦아서 고치지 않았는데 지금은 조금씩이라도 고치려 노력 중이에요. [이렇게 해야 바로 쓴다]같은 책 읽어보면 하이구야, 내 글이 죄다 엉터리구나, 라는 것을 느껴요. 아직 다 읽지도 못했지만..

하루(春) 2005-05-27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열정과 냉정사이 -Blu'를 읽고 있는데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대체 이게 작가의 문제인지, 번역가의 문제인지 아주 답답해요.

oldhand 2005-05-27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방위의 세계에 입문하신것을 환영합니다! (아 장교라서 민방위 훈련은 면제인가요?)
번역은 정말 해당언어와 국어 두가지 다 잘하는 사람이 해야 하는 건데 말이죠.

로드무비 2005-05-27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일본의 소설은 비문이 그 이상한 분위기와 맛을 살려주는 경우가 있어요.
마태우스님이 지적하신 저 예들도 그렇단 말은 아니고요.
한 가지 아는 건 마태우스님 글은 비문이 거의 없다는 것.^^

마태우스 2005-05-27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핸드님/무슨 말씀! 민방위 받아야 합니다!!
하루님/그렇게 많이 팔린 책의 번역이 안좋단 말이죠? 으음...
복돌님/님은 별로 비문 없어요. 왜 자학하시고 그러세요.... 그리고 그런 책 읽으면 자신의 삶이 부정되죠. 그런 책 읽지 마시고, '대통령과..'같은 책 읽으세요 자신감 충만할 것 같아요
별사탕님/헤헤헤. 동의해 주시니 감사.
토토랑님/그냥 제 나름대로 고쳐 봅니다. 해당 문장은 여러 개로 나누었더라면 더 좋았을 뻔 했는데, 원문이 길어서 그렇게 했나봐요. 그래도 정확한 이해를 위해 나누는 게 좋았죠.
[한집 건너 이웃의 구멍가게에는 책 같은 것도 조금 팔아 어느날 ..]
'한집 건너 이웃의 구멍가게에는 책 같은 것도 팔곤 했다. 어느날..' 이렇게 하면 낫지 않을까요...

마태우스 2005-05-27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님 말씀 듣고 보니까 그런 경우도 있었던 것 같아요. 뜬금없는 단어가 튀어나와 글의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로드무비님, 헤헤헤헤. 제가 좋아하는 거 아시죠?

돌바람 2005-05-27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엔 그냥 유숙자 선생의 오역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구요, 외려 직역에서 나온 거칠음 같아 보여요. 다자이 오사무의 글이 좀 그렇고, 거기다 일본어도 좀 늘어지면 한이 없어서(~감사해서 고맙습니다 식의) 위의 1번만 예를 들면 私やっぱり ...哀調帯びた調子に我を忘れたりした仕事がよくありました. 하고 그대로 직역한 것 같거든요. 실은 편집자가 제일 힘들어 하는 번역물이 원문을 직역한 경우인데요 그런 경우 앞뒤 맞춰서 우리말(문법)을 살려줄 것이냐, 작가의 문체를 살려줄 것이냐, 그야말로 번역자의 실수냐를 두고 고민하게 되지요. 대게는 작가의 문체까지 살려줄 수 있는 실력 있는 편집자(번역자와 싸울 수 있을 만한)가 없기도 하구요, 직역의 경우 원문 훼손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그냥 넘어가기도 한답니다. 그래도 아쉬워요. 원문을 살려준다는 건 그대로 번역한다는 게 아닌데 말예요.

아영엄마 2005-05-27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종 무슨 말인지 종잡기 어렵게 번역된 문장을 보면 짜증이 나기도 하던데 로드무비님이나 stonywind님 댓글보니 번역할 때의 어려움도 있음을 알겠군요. 아무튼 비문 뒤에 단 님의 글 읽고 아침부터 웃었습니다.

줄리 2005-05-27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서워요. 글쓰는거 무서워요. 전 말할때도 비말투성이, 문장 쓸때도 비문 투성이인걸 알거든요... 그런데요. 제 글은 많은 사람들이 안읽고, 되도록 짧게 쓰니 용서해주실거죠^^ 그런데 전 비문이라고 해서 비석에 세우는 글 이야기 하시는줄 알았어요...

숨은아이 2005-05-27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고생하셨습니다. 일본어 문법이 우리말 문법과 비슷해서 직역의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많아요. 직역을 하면 "잃곤 하던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하는 식으로 문장이 지저분해지더라구요. 전 이런 비문들이 지나치게 원작에 충실한 데서 나왔으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데 "교훈하다"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교훈"이란 말 자체에 "가르침"이라는 뜻이 있어, "교훈하다"라 하면 "가르치고 타이르다"란 뜻이 된답니다.

부리 2005-05-27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교훈하다란 말이 정말 있군요. 제가 그럴까봐 출판사에 안보내고 여기다 쓴 거죠. 글구 원문에 충실한 것도 좋지만, 꼭 그렇게 단어 하나하나에 집착을 해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줄리님/용서라뇨..줄리님은 미녀잖습니까
아영엄마님/그러게요. 쓸 땐 몰랐는데 알라딘의 다른 분들이 지적해주신 글을 읽으니 또 이해가 되는 구석도 있네요
스토니윈드님/하, 하여간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찾아뵙고 사부로 모시겠습니다.

panda78 2005-05-27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저 아녜요 제가 드린 거 아니라고 생각해요. 흠흠.. ;;
(무지 좋았다고 하셨음 기억이 안 나도 제가 드렸어요! 할라 그랬는데.. ^^;)

똥개 2005-05-28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문이 엉망인 건..... 번역자의 자질 문제도 있지만, 출판계의 구조적 병폐인 측면이 강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대로 된 번역문이 나올 수 있는 구조적 조건을 만들려면 책값이 지금보다 3-7배 정도는 비싸져야 합니다. 싼게 비지떡이지요.. (그런데 세계적으로도 싼 편에 속하는 지금의 책값도 비싸다고 아우성인 판국에 책값이 정상화된다고 하면 책을 사서 볼 사람들이 남아날까요... 그러니 대안은 공공도서관밖에 없는 겁니다. 도서관 4천개! 이 꿈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번역서의 품질이 나아지기를 기대하기 어려울 겁니다...) 부끄럽게도 저 역시도 출간 일정에 쫓겨 만족할 만큼 충분히 교열을 하지 못하고 미숙아를 낳은 적이 여러번 있습니다. 꽤 짜임새있는 출판사의 편집자가 한달 평균 1.2권 정도(연간 15권 내외)를 작업합니다. 번역문이 깔끔하다면 이게 결코 무리한 양은 아닌데, 문제는 번역서의 대부분(제 경험으로는 7할 내지 8할)은 '자동번역기로 뽑아도 이 정도는 나오겠다' 싶을 정도의 엉망이고 특히 문장 구조가 비슷한(그리고 결정적으로 번역료가 영문보다 싼) 일문 번역의 날림도는 일반 독자들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 문제에 관해 제가 썼던 글 하나 링크걸어둡니다.

http://www.ddonggae.pe.kr/bbs/bbs.htm?dbname=N0047&mode=read&premode=list&page=1&ftype=&fval=&backdepth=&seq=13&num=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