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에 웬일이야?”

만날 때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내게 반말로, 스스럼없이 말을 붙여 왔다. 쑥스러운 난 “그, 그게요...”라며 수줍게 맞섰는데, 그녀는 손을 꼭 붙잡고 있던 남자가 자기 애인이라고 소개를 했다. 그런 장면, TV 같은 데서 많이 봤던 그 장면을 직접 겪으니 영 어색했다. 안그래도 여자한테 미안했는데 괜히 그 남자한테까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뒷머리를 묶은 게 인상적인 그 남자는 우리에게 시간을 주려는 듯 화장실에 간다고 사라졌다. 둘만 남았다. 난 그 남자와의 나이 차이가 궁금했다. 4살 차이란다.

나: 이제야 제대로 된 나이 차이를 만났군요?

여자: 왜 존대말을 하고 그러지? 하여간 내 남자친구, 나 예쁘다고 평일에도 이렇게 내려와.

나: 서울에서?

여자: 집이 파주야. 서울역에서 한시간 더 간데.

나: 와, 정성이다!


생각해보니 나랑 헤어질 때마다 그녀는 온양온천 기차역, 혹은 KTX, 역에서 나를 전송하곤 했었다. 서울역에서 내리면 택시 안잡힌다고 영등포역에 도착할 시간이면 술에 취한 나를 전화로 깨워줬었지. 세월이 흘러서 이제 그녀는 다른 남자를 전송하러 역에 나간다.

여자: 애인 없어?

나: 없--지! 나 독신주의자잖아!

여자: 그때도 그래놓고선.


그랬었던가? 그 당시에도 내가 독신주의자였던가? 난 내가 결혼에 별로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그녀를 사귀면서 절실히 깨달았었다. 조직을 거느리지 않는 시라소니처럼, 내게 있어서 아내와 자식이란 사치였고, 감당할 수 없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보니 내가 그녀에게 독신을 강조한 적이 여러번 있었던 것 같다. 행여 그녀가 희망을 가질까봐 그랬다는 게 솔직한 말일 것이다. 여자를 사귀면서 독신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 이기적인 행위다.


남자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분위기는 다시 어색해졌다.

나: 커, 커피 한잔 드실래요?

반응이 없다. 이젠 내가 빠져줄 차례인 것 같아서, “그럼 두분 오붓한 시간 보내세요”라고 말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여자가 “연락 좀 해!”라고 했다. 숫자 외우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지라 그녀의 전화번호가 대번에 생각났지만, 아마 연락은 하지 않을 것 같다. 모르겠다. 새 책이 나오면 주소를 묻기 위해 전화를 할지도.


내가 좋아하는 윤종신은 <오래전 그날>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오늘도 난 감사드렸어/몇해지나 얼핏 너를 봤을 때/누군가 널 그토록 아-아름답게/지켜주고 있었음을...”

노래의 주인공만큼 그녀를 절실히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그녀 곁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그다지 감사할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있을 때 잘 못해준 것이 못내 미안할 뿐. 그 남자가 나보다 착한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은 든다.

 

 황당한 얘기 하나.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을 했고, 어제 하던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자료에 의문이 생겨 담당 선생한테 전화를 했다. 그의 말이다.

“아, 안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어요. 그 회의 말이죠, 한분이 시간이 안된다고 해서 그 다음주 수요일...그러니까 20일로 연기했어요”

이런이런. 어제 밤샜으면 정말 억울할 뻔했다. 어제 술을 못마신 게 조금 억울해지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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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07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완성 2005-04-07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영화폴더에 글이 올라와있네요^-^
저도 마태님같은 일을 겪으면 어우..전 마태님처럼 차분하게 대해주지 못할 것같은데요. 보자마자 도망가버릴 거예요;; 그나저나..술 못드신 건 저도 정말 아쉬워요..우리가 좀 더 酒님을 열심히 모셔야하는데..

노부후사 2005-04-07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13년 차이면... 흠... 능력 좋으셔요 마태님. ㅋㅋ 그런데 이 페이퍼는 왜 <내가 본 영화들>에 있는 것이죠? 혹시 영화 보시고 감상문 쓰신 거여요?

ceylontea 2005-04-07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미리 해놓으시면 나중에 룰루랄라 하실 수 있으시잖아요. ^^

울보 2005-04-07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비몽사몽이신가요,,
그럼 오늘은 편하게 주무셔도 되겠네요....

2005-04-07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春) 2005-04-07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윤종신 10집 나온 거 아세요? 근데, 뭐하러 헤어진 연인한테 책을 보내주죠?

chika 2005-04-07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하루님 말씀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요? 책은 우리에게나 돌리심이...? ^^;;
- 그래도 마태우스님, 결혼하시길 기원함다~!!! ^^

클리오 2005-04-07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3년 차이 나는데도 반말로 스스럼없이 말을 거셨다구요, 그 여자분이? 이야! 그 나이의 후배와 님나이의 선배를 생각해보니 도저히 연결이 안되는군요... ^^

줄리 2005-04-07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가 굉장히 괜찮으신분일것 같은 느낌이 팍 드는거는 왜 일까요? 마태님 그동안 놓친 괜찮은 여자들 도대체 몇명이나 되는거예요!^^

2005-04-08 0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4-08 0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터라겐 2005-04-08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영화를 너무 많이 보신것 아닌가요? ㅎㅎ
그 여자분 자신이 있으니깐 마태님 앞에서 당당하게 앤 소개시켜 주신거예요...헤어졌어도 난 멋진 사람 만나서 연애한다...뭐 이런...어디서 들었는데 헤어진 연인보다 새애인이 더 멋지면 당당히 소개하고 그렇지 않으면 모르는척 지나간다는 소릴하더라구요...(심하게 자극받으셔서 탈 독신의 세계로...) 결혼은 해보고 나서 후회하는게 안하고 후회하는것보담 한수 위랍니다.. 너무 생뚱맞은 소리만 하고 가는거 아닌가 모르겠네요...아줌마들은 쓸데없는 사건에 목숨을 거는지라...

마태우스 2005-04-08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아 그렇구나... 새 애인이 멋지니까 소개해준 거군요. 그런데 저 웬만큼 자극받아도 탈독신은 안될 것 같아요.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걸요.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런 말이 애정에서 비롯된 거 잘 알거든요
줄리님/그간 놓친 괜찮은 여자, 꽤 되지요 아마. 저랑 사귀기엔 아까운 여자분들이었어요....
새벽별님/그러게요^^
클리오님/원래 반말이 친해지는 비결 중 하나랍니다
치카님/님 주소는 제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책 나오는대로 배달 될 겁니다. 사실 데이터베이스라고 거창하게 얘기하지만 사실은 종이 쪼가리에 적어서 서랍에 넣어둔 거라는..
하루님/그, 그게요..... 그래도 제 옛날 책이 나올 때 기뻐해주던 생각이 나서요...
속삭이신 분/님 말씀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울보님/지금도 전 비몽사몽입니다...한시 반에 집에 들어왔어요..
실론티님/그래요, 룰루랄라 할 수 있는 건 분명 좋은 일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다 한다는...
에피님/잽싸게 카테고리 바꿨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급하게 올리다 저지른 실수입다
사과님/부산 가면 술이나 한잔...^^
속삭이신 날개님/감사합니다. 역시 님밖에 없습니다

2005-04-08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4-08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