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소재도 겁나게 많이 우려먹은 소재입니다. 죄송합니다.
학생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내가 허구한 날 스포츠신문만 끼고 있던 장면이 떠오를 거다. 그때의 난 스포츠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살았다. "야구선수 이만수를 아느냐"는 질문에 친구가 모른다고 답하면 "인생의 반을 헛살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사 생각해보니 이만수는 어떤 이에게는 인생의 반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다른 가치를 쫓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때는 그걸 몰랐다. 난 프로야구 선수의 타율은 물론이고 홈런이 몇개인지, 심지어 프로야구 원년부터 타격왕이 누구였는지를 꿰고 있었다. 야구가 취미인 친구를 만나면 그런 얘기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스포츠신문이란 게 스포츠연예 신문이니, TV를 굳이 보지 않아도 연예 쪽 지식을 상당히 갖출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바람 피운 W 양이 누구냐”는 게 궁금한 친구들은 꼭 나에게 와서 물어봤고, 난 즉각 대답을 해줬었다.
게임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이 있는 것처럼, 스포츠에 취미를 가지고 열심히 보는 게 나쁜 것은 아니다. 도박이나 뽕, 음주가무같이 자신을 피폐시키는 것이 아닌, 지극히 건전한 취미가 바로 스포츠 아닌가. 하지만 취미란 것은 자기 일을 잘 해 가면서 남는 시간에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가와사끼 병의 6가지 진단기준'이 뭔지도 모르면서 프로야구 선수의 타율을 줄줄 외운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었다. 어찌되었건 난 대학을 그럭저럭 졸업했고, 기생충학교실에서 조교로 일하게 된다. 조교 시절에도 난 학생 때와 다를 바가 없었는데, 학생 때 못보던 야구경기를 TV로 실컷 볼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가끔씩 야구장에 갔다는 게 다른 점이다. 요컨대 난 학생 때보다 훨씬 더 매니아가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OB-지금의 두산-이 우승을 했던 95년에는 숫제 야구에 미쳐 살았다.
내가 야구를 좋아하게 된 것은 중1 때부터다. 고교야구가 붐을 이루었던 그 시절, 난 열심히 신문기사를 스크랩했고, TV 혹은 라디오로 야구 경기를 봤다. 프로야구가 생긴 고1 때부터는 수업 시간에 이어폰을 끼고 야구를 들었다. 이렇듯 기초가 튼튼한지라 90년대의 나는 거의 해설가 수준이 되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후배와 야구장에 갔는데, 정민철 선수가 엄청나게 잘 던지며 LG 타선을 꽁꽁 묶었다. 9회초 원아웃인가, LG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난 후배에게 말했다. “홈런을 조심해야 돼!”
나 자신도 믿기지 않게 그 선수는 홈런을 쳤고, 후배는 나를 신이라 부르며 존경했다.
그러다 나를 바꾼 한권의 책을 만났다. 강모교수가 쓴 그 책을 보고서야 난 그동안의 내 삶이 헛것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헛것은 아니다. 야구를 좋아하며 살던 내 이십년도 나름의 보람은 있는 거니까. 그보다는, 인생에서 지향하는 바가 달라졌다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듯싶다. 그때부터 난 그간 눈길조차 두지 않았던 우리 사회, 우리 정치, 우리 경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스포츠란만 보던 것에서 탈피해 신문의 사설, 칼럼을 읽었다. 나 자신이 사실은 혜택받은 사람이라는 자각과 더불어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된 것, 야구 대신 독서가 취미로 자리잡은 것도 그때부터다.
그러기를 9년, 나는 많이 변한 것 같다. 지금의 인생에 만족하고 있으니, 그 한권의 책이야말로 참으로 고마운 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내가 그 동안 잃어버린 것은 없을까? 물론 있다. 기초가 튼튼한 것만 믿고 있었는데, 난 어느 새 우리나라 야구를 하나도 모른다. 언제 친구와 야구장에 갔는데, 후보는 고사하고 주전 선수들조차 난 거의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옛날에 그랬듯이 친구는 투수교체 타이밍, 어느 선수가 대타로 나올 것인가를 정확하게 예측해 날 감탄하게 했다. 농구도 그렇다. 농구를 좋아해 자주 보지만, 더 이상 난 예전처럼 예리하게 경기를 분석하지 못한다. 농구 지식에 갈증을 느껴 매니아방에 갔더니,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와, 이런 것도 아는구나,는 감탄만 하다 그곳을 나왔는데, 그들이 쓰는 약자-포인트가드를 포가라고 하더만-도 감이 잘 안왔다. 그래서 후회되는가? 물론 아니다. 그들과 나는 삶의 지향점이 다를 뿐, 우열은 없으니까. 내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에 열광하듯이, 그들은 단테 존스에게 빠져드는 것이니까. 그렇긴 해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기는 하다. 가끔, 아주 가끔은 이렇게 외치고 싶다.
“니들, 많이 컸네? 예전에는 쥐뿔도 모르던 애들이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