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이라는, 별 재미없는 책에 나오는 얘기다.

[나이가 제법 든 여성이 맞선을 보러 갔다. H라는 남자인데, 무슨 직장인지 몰라도 오후 네시면 퇴근한단다. 그럼 심심하지 않냐는 여자의 물음에 H는 '가끔 적적할 때는 있어도 심심하지는 않다'고 대답한다. 심심한 건 '정말로 아무 할 일이 없는 상태'라나. 그럼 뭘 하느냐고 묻자 남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저 밥 잘 해먹습니다. 반찬도 간단한 것은 제가 만들고...'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에게 남자가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렇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달라지리라 믿습니다'


나중에 헤어지면서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나도 물론 밥 좋아해요. 특히 맛있는 거 먹는 걸 정말 좋아해요. 그래요, 누군가 해주는 사람만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행복하게 잘 먹어보이면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겠어요? 하지만요, 그걸...제가 하면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어머님의 팔이 부러진 후,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셔서 엄마 수발을 들었다. 그래도 설거지는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내자식이 뭔일이다냐”를 외치는 할머니를 밀어내고 그릇들을 씻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서 뒤를 보니까 할머니가 울면서 옷을 입는다.

“난 아무 필요가 없는 사람잉께....집에 가버릴란다”

그 뒤부터 할머니가 안계실 때를 제외하고는 내가 주방에 들어간 적은 없다.


할머니가 댁에 가서 주무시는 저녁, 설거지를 하다보니 먼저 씻어놓은 그릇이 눈에 들어온다. 이럴 수가. 할머니가 씻어놓은 그릇에는 음식 찌꺼기가 여기저기 묻어있다. 엄마한테 말씀드렸다.

“엄마, 할머니가 씻은 그릇이 별로 안깨끗해요”

“나도 안다. 현주(가명.여동생) 집에 있을 때도 그랬대”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설거지 하나는 앗싸리하게 하는 나로서는 할머니가 씻은 그릇에 밥을 먹는 게 영 찝찝했다. 그렇다고 내가 하자니 할머니가 또 울텐데 어찌해야 할까.


오늘 아침, 설거지를 하려는 할머니를 어머님이 말렸다.

“어머니, 민이가 하겠대요. 어머니가 씻은 게 별로 위생적이지 않아요”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매우 충격을 받은 듯, 말을 잃었다. 난 <퀴즈 대한민국>을 크게 틀어놓고 설거지를 했고-앗싸리하게-잠시 망연자실해 있던 할머니는 헹구는 건 당신이 하겠다, 장가 가서도 이럴 거냐 등등의 말씀을 하시며 간섭을 했다. 난 “할머니, 알았으니까 가 계세요”라며 할머니를 쫓아냈지만, 할머니는 영 불만인 듯했다.


내가 하니 마음이 편해 좋긴 하지만, 할머니가 상처를 받지 않았나 걱정이다. 나이가 드시면서 점점 더 삐지는 일이 잦은데, ‘필요없는 사람이 되버렸다’는 생각에 또다시 보따리를 싸면 어쩔까. 설거지, 우리 집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것 같다.


* 최근에 느낀 건데, 설거지는 밥먹고 난 직후에 하는 게 좋다. 배가 부른 포만감에서 설거지를 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놔두면 놔둘수록 더 할 게 많아지는 게 설거지다. 요즘 몸살기가 있어 타이레놀에 의지해 사는데, 엊그제는 저녁을 먹고 안되겠다 싶어 한잠 자고 일어났더니 엄마가 한손으로 설거지를 다 끝내 놓으셨다. 자버린 걸 내가 어찌나 후회했는지.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만두 2005-02-20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기 조심하시고 주부 습진도 조심하세요^^

플라시보 2005-02-20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의견에 동감. 꼭 고무장갑 끼시고 설거지 하시길.^^

울보 2005-02-20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한 아드님이시네요..
할머니가 연세가 있으셔셔 그럴거예요..
주부습진..히히 우리 신랑 생각이 나서 간만에 설거지 하면 얼마나 요란한데요..
그거 보싫어서도 제가 한단닙다..

비로그인 2005-02-20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엔 가사관리사, 라는 직업이 있다더라구요. 흔히 가사도우미라고 부르는 분들은 여성들이 대부분인데 이 직업엔 남자들도 많다나봐요. 그러니까 주로 독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바쁜 여성 독신자들에겐 신청한 요일에 가서 일종의 '가정적인 남편역할'을 해 주는 거랍니다. 벽에 못을 박아준다거나, 박스를 옮긴다거나 밀린 청소와 설거지, 요리와 빨래까지 해 준다네요. 남성 독신자들에겐 여성 가사관리사가 가서 비슷한 일을 해 주면 되는 거구요. 자격증이 필요한 건진 모르겠지만 저도 함 뛰어볼까 생각 중인데 부업거리로..워쪄요, 마태우스님?

깍두기 2005-02-20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세가 드시면 설거지 같은 걸 깨끗이 할 수 없답니다. 저희 시어머님도 그러셨어요. 그래도 할머님께서 무언가 할 일이 있으셔야 속상하지 않으실텐데요. 설거지 말고 다른 일을 부탁해 보세요^^
(위의 목욕탕 페이퍼와 이 글을 같이 읽어보니 마태님 상당히 깔끔하시네요. 뜻밖이어요=3=3=3)

줄리 2005-02-20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제를 조금만 풀고 뜨거운 물을 받아서 거품을 낸 후 그릇들을 넣은 후 10분 후에 설겆이 하면 정말 쉽고 위생적이랍니다. 그릇들 거품목욕시켜주는거죠. 그렇게 하면 설거지 하는것두 재밌고 즐겁더군요.

하루(春) 2005-02-20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딜레마에 빠지셨군요. 이럴 때 변신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요술공주 밍키처럼... ^^;

마냐 2005-02-21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깍두기성님의 뜻밖이란 말이 매우 신선함다..ㅋㅋㅋ
암튼, 어쩌다 일하는 녀석이 주부습진까지 달고 사는 터라..(뭐, 아토피 연장선이겠지만 말임다)...마태님 걱정도 한번 더 해봅니다. 부엌과 친한 남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멋있슴다만..

엔리꼬 2005-02-21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할머니도 가끔 위의 경우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현재 85살이시고, 돈 벌어오신 것은 40년은 되셨고, 저희가 크게 효도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할머니께서 내가 주방일이라도 할 수 있을 때까지 살아야지, 일도 못하고 누워만 있기는 싫다고 하시면서 그때는 죽어야지 그런 말 하십니다. 저희가 할머니 불편하게 해드린 적도 없고, 절대로 짐이 된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말이죠... 그럴 때마다 너무 죄송스럽고, 할머니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섭섭하기도 하고(우리가 할머니를 그런 존재로밖에 생각안하는 것으로 비춰져서.) 여러 복합적인 생각이 듭니다....쩝.. 살아계실 때 자주 찾아뵙고 인사 많이 드려야겠습니다.

마태우스 2005-02-21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림님/오늘도 할머니가 하신 일 때문에 "그러지 마세요" 하고 왔답니다. 저 사실 할머니한테 잘 못해요. 마음은 있는데, 할머니가 선의로 하신 일들의 결과가 안좋을 떄가 많아서.... 그 선의를 이해하고 넘어가면 되는데, 꼭 지적하게 되더군요.
마냐님/부끄럽습니다. 열심히 해서 주부습진 한번 걸려 보겠습니다. 그 정도 안하면 어찌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그래서 장갑 안껴요 호호)
하루님/그러게 말입니다.... 밍키, 이쁘죠^^
dsx님/전 세제를 좀 많이 쓰는 편이어요. 벤지 목욕시킬 때도 그렇구요. 님 말씀대로 하면 세재를 줄일 수 있겠지만, 그게 귀찮아서 말입니다. 하핫. 한번 해볼께요
깍두기님/사실 전반적으로 보면 깔끔하진 않지만, 특정 분야에서만 깔끔합니다. 예컨대 테니스 치고 와서 그냥 잔다든지 하는 건 엽기적이지만, 설거지 같은 건 정말 야물게 하거든요. 이유는 몰라요^^ 글구 절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마세요. 전 깍두기님이 좋은데...
복돌님/그런 직업도 있어요? 저도 할래요! 와와!
울보님/남자들은 설거지를 해도 요란하게 하지요. 한번 할 때 티를 내려고 그러는 건지^^ 저도 그래요 호홋.
플라시보님/장갑 하나 선물해주세요!!!
따우님/그렇게 해볼께요. 특히 비눗물에 담구라고 하더군요
물만두님/만두님도 건강하시고, 주부습진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무탄트 2005-02-21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할머님께서 살아계실 때, 저희 집에서 두세달 정도 머무신 적이 있었어요. 그때 할머님이 설겆이를 하셨는데 어린 제 눈에도 그릇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밥풀이 신경이 쓰이는데 하물며 무척 깔끔한 편인 저희 어머님 성에 찰 리가 있겠습니까만, 저희 어머님은 아무 말씀도 안하시더군요. 할머님께 하시지 말란 말씀도 안하시구요. 궁금해서 제가 어머니께 그 연유를 여쭸더니 그러시더군요. 나이가 드신 분이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게 할머님 소일거리니 저보고 참으라고 하시더군요. 평소 어머니의 깔끔함을 알기 때문에 그 말씀이 제겐 더 깊이 와닿았습니다. 어르신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 또한 효도의 한 방법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다시 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