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이병헌이 담임을 맡은 반 학생이 가게 주인에게 쫓겨들어온다. 가게 주인에 따르면 학생이 가게 물건을 훔쳤다는 것. 이병헌은 “그랬냐”고 학생에게 묻고, 학생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가게 주인은 “내가 봤는데 거짓말을 한다”고 우겼지만, 이병헌은 이렇게 그를 내쫓는다.

“안했다잖아요. 우리반 애들은 거짓말 같은 거 안해요”

자신을 믿어주는 그런 담임이라면, 존경할만하지 않는가? 그 사건 이후 같은 반 애들은 이런 말을 한다.

“난 담임을 담탱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다”


엊그제 밤, 누나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 단잠을 깨운 전화의 사연은 이렇다. 누나에게는 둘째 조카가 있는데, 걔와 같은 반 여자아이의 휴대폰에 사흘간에 걸쳐 욕설이 난무한 문자메시지가 전송되었다. 화가 난 여아의 어머니는 이동통신 회사에 문의했고, 문자가 전송된 휴대폰이 내 조카애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녀는 펄펄 뛰면서 우리 누나에게 전화를 했고, “당장 경찰서에 가자”고 협박했단다. 사과 정도로 끝낼 수 있는 일을 경찰서 운운하는 그 여자가 황당하게 느껴졌다. 하여간 누나가 내게 전화한 까닭은, 다른 사람이 내 조카 번호처럼 위장해서 문자를 보낼 수 있냐는 것.

“나야 모르지. 그렇지만 승호(조카이름. 가명)는 뭐래?”

“안했다고 펄쩍 뛰어. 지금도 자기 아니라고 울고 있어”

안했다는데 믿어야지 않겠냐면서, 난 조카를 바꿔달라고 했다.

“승호야, 진짜 니가 그런 거 아니지?”

“응”

“그래, 삼촌은 너 믿어. 그러니까 그 여자가 경찰서를 가든 말든 맘대로 하라고 하자”

애의 부모라면 나처럼 해야지 않겠냐면서 난 혼자 흡족해했다. 그러나.


다음날, 누나는 엘지텔레콤에 가서 그것이 조카 휴대폰에서 전송되었다는 것을 재차 확인했고, 조카의 자백도 받아냈다. 이런이런, 그렇게 귀여운 얼굴을 하고서는 거짓말을 하다니. 자신이 한 짓이 탄로나자 무서웠을테고, 그래서 일단 부인부터 하고 봤을 거다. 누나가 이통회사에 가서 알아보길 잘했지, 내가 나섰다면 x팔릴 뻔했다. 조카의 말에 의하면 그 여자애가 맨날 자기한테 “땅꼬마(키가 작다는 뜻)”라고 놀리며 괴롭혀서 약이 올랐다나?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나도 어릴 적에 내가 그런 일을 가지고 안했다고 우긴 적이 몇 번 있었던 것 같다. 어릴 적만 그랬나. 다 커서도 그랬다. 냉동실 문을 열어놓고 가는 바람에 몇십만원 쯤 하는 콤프레서를 태운 적이 있었는데, 난 그걸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우겼다. 그때 난, 물어내라고 할까봐 무서웠던 거다. 어린애의 거짓말은 봐줄 수 있지만, 다 큰 사람의 거짓말은, 그것도 뻔한 거짓말은 보는 사람을 서글프게 만든다. 바르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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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inara 2005-01-13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뭡니까? 이게? 재벌께서 몇십만원에 거짓말을 하시다니..나빠요..나빠..

솔직히 말해보세요..냉동실 문열어 둔게 챙피해서 거짓말 한거지요?

진주 2005-01-13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이로군요...냉동실 문 열어놓고 다니는 사람이 하나가 아니라서.........

작은위로 2005-01-13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르게 살자.

가능하면 지키고 싶지만, 세상은 그렇게 놔두질 않아요. 흑흑흑.

하루에도 수십번씩 고객과 통화하면서 거짓말, 많이 해요. 흑흑흑흑흑....

2005-01-13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05-01-13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마태님이 거짓말하셔도 좋아요. 단 진짜 초코파이좀 줘봐요...

maverick 2005-01-13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때는 거짓말 한번 하면 혼자 쫄아서 가슴이 콩닥콩닥했는데 이제는 거짓말 해놓고 내가 거짓말을 했는지도 까먹을만큼 아무렇지 않을때 더 서글프더군요 ^^

딸기 2005-01-13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거짓말을 정말 많이 하고, 정말 많이 들킵니다. 쪽팔리게스리...

BRINY 2005-01-13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저도 왕따 당하는 학생 상담 중에 바로 그 학생 핸드폰으로 욕설을 담은 문자가 와서 직접 보게 되었어요. 기가 막히기도 하고, 화가 나서 바로 전화했는데, 그 애는 자기가 한게 아니라고, 친구한테 잠깐 핸드폰을 빌려줬는데 친구가 그랬다는 둥...차라리 당당하게 [걔가 이래저래 맘에 안들어서 그랬어요]라고 말못하나요.

니르바나 2005-01-13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짓말을 하는 순간부터 심리적으로 어른이 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빈 서판에 거짓말이 주는 이점을 그리게 되니까요.

진주 2005-01-13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장고의 생명이 콤프레샤라는 걸 당해 본 사람은 안답니다. 콤프레샤 나가서 우린 냉장고 새로 샀다니까요 ㅠㅠ

비로그인 2005-01-14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에게 해를 주지 않을 정도의 거짓말은, 상대방의 거짓말을 눈치챈 저도 암암리에 묵인해주는 편인데. 물론 저도 가끔은 거짓말을 하지만요.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복수란 것이 자신이 파멸될 줄 알면서도 끊임없는 욕망으로 치달아가쟎아요. 얼마나 분했으면 그랬겠어요. 조카와 친구와의 관계가 잘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마태우스 2005-01-14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오오 심오한 말씀이옵니다.... 님이 거짓말을 한다니 믿기지 않사옵니다

박찬미님/제가 박살낸 콤프레서는...학교 냉동실 거라 겁나게 비싸답니다.

새벽별님/그럼요... 온 방을 다 냉동시키려면 무리가 가니까...아무래도..

니르바나님/거짓말이 어른이 되는 순간이다...그렇군요...조카도 이제 어른이네요^^

브리니님/하하, 메시지로 욕하면서 당당해질 수는 없지 않을까 싶네요.

뱀딸기님/많이 들킨다는 건, 그만큼 순수하다는 뜻이죠

매버릭님/어머나, 전 지금도 그런데...^^

여우님/쵸코파이는 잊어요. 전 요즘 오예스만 먹어요

작은위로님/님도 그러신다니 위안이 됩니다^^

수니님/재벌도 몇십만원 날리는 건 아깝더군요... 그게 몇십만원이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라....흐흐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