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장면은 안나오던데...

영화를 전공하는 친구들과 모임을 갖고 세미나까지 했던 나, 영화도 제법 많이 보지만, 꼭 봐야 할 영화들을 거의 보지 않은 탓에 내공이랄 게 없다. “어떻게 <대부>도 안봤냐?”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그것 말고도 안본 게 여럿이다. 그중 하나가 <8월의 크리스마스>. 이 영화를 안본 탓에 꼭 마음의 빚을 진 기분이었는데, 어제 케이블에서 하기에 잘됐다 싶어서 봤다. 보고 나니까 사람들이 이 영화를 호평하는 이유가 절제된 감정표현, 그리고 신파로 흐르지 않은 결말, 심은하의 미모 이런 것들이 아닐까 나름대로 생각해 봤다. 개인적으로 느낀 점 몇가지.


1. 심은하의 돌발질문, “아저씨, 오늘은 왜 반말해요?”

우리나라 말에는 반말과 존대말이 있다. 영어처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Who are you?'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상대에 따라 “누구십니까?” “누구니?” “뭐냐 넌?” 등의 말을 가려써야 한다. 하지만 존대말의 존재를 아는지라 반말을 들으면 대개 기분이 좋지 않으며, ’날 언제 봤다고 반말이냐‘고 씩씩거리기 마련이다. 그러니 상대가 누구던간에 존대말로 임해 주면 좋으련만, 사람들이 또 그렇지가 않다. 다른 이와 말싸움을 하다보면 꼭 “왜 반말이냐”를 시작으로 싸움의 본질이 이상하게 흐르기 시작, “너 몇 살이냐” “내가 너보다 밥을 몇그릇 더먹었다”같은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으로 변질된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우리 사회에서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존대말과 반말의 이원화된 언어체계가 아닐까.


2. 심은하의 돌발질문 두 번째, “아저씨는 왜 나만 보면 웃어요?”

왜 웃긴. 좋으니까 웃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내가 지금 그러는 것처럼. 반면 싫어하는 사람, 만나기 싫은데 억지로 만나야 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웃음은 지극히 가식적이고, 보는 사람을 안쓰럽게 한다.


3. 불법주차 단속

불법주차 단속원들이 식당에서 쫓겨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어디서나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 역시 우리 사회의 공익에 기여하건만, 왜 그런 대접을 받는 걸까. 혜택 대신 단속을 주로 하는 직업의 숙명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실적주의 또한 그런 경향을 부추긴다. 예컨대 우리 집 근처에 있는 경남예식장에서는 토요일이면 몇건의 예식이 열린다. 그 뒷골목은 그 시간대가 되면 차들이 빽빽이 들어서는데, 그치들은 토요일 오전 11시 58분 정도에 와서 한 서른대 정도의 차에 우르르 스티커를 붙이고 사라진다. 걸리는 시간은 불과 10분도 채 안될 정도의 빠른 행보다. 도대체, 큰길도 아니고 골목길의 하객들이 뭐 그리 교통에 지장을 준다고 그러는 걸까.


4. 영정사진

가족들이 와서 단체사진을 찍는다. 다 찍고 나서 아들은 할머니에게 독사진을 권한다. 나이가 들어 찍는 사진은 영정 사진을 대체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그런지, 할머니가 사진 찍는 모습은, 그게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애처롭게 느껴진다. 아버님이 본격적으로 입원하시기 전에 아버님은 어머님과 더불어 사진을 찍으러 가자고 하셨고, 두분은 함께 찍은 사진과 독사진을 각각 찍었다. 그 사진은 3년쯤 뒤 영정사진으로 씌여졌는데, 그 3년간 줄곧 입원을 하셨고, 똑바로 앉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때 못찍었으면 영정사진을 뭘로 할까 고민했을 거다. 사진을 찍을 당시 아버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던 걸까.


5. 뇌종양?

한석규의 사인은 정확히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뇌종양이 아닐까 싶다. 어떤 병이든지 사망에 이르게 하는 병이 무서운 것은, 그 병이 갑자기 죽는 게 아니라 자신과 지인들의 진을 다 빼놓고 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죽기 직전까지 평온함을 유지하는 한석규의 모습은 실제 환자들과 많이 다르지 않을까? 그나저나 <닥터봉>을 시작으로 나오는 영화마다 흥행을 시켰던 한석규는 최근들어 영 힘을 못쓰고 있다. 최근작인 <주홍글씨> 역시 나를 비롯한 관객들에게 커다란 실망을 안겨 줬는데, 그건 시나리오가 별로 안좋았던 탓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연기력은 뛰어난 배우인만큼, 좋은 작품만 만난다면 다시 재기할 수 있지 않을까. 고현정도 왔는데, 돌연 우리 곁을 떠났던 심은하도 제발 좀 돌아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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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후사 2004-12-31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홍글씨>는 감독이 워낙 예술가티를 내려고 발버둥치는 바람에 망친 영화같아요. 감독 경력을 보니까 프랑스물 좀 꽤 먹었던데, 이상하게 영화판에서는 프랑스물 먹고 온 감독들이 영 정신을 못차려요. 박광수가 대표적이죠. 쩝... --;;

비로그인 2004-12-31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프지 않았나요? 전 슬프던데...개인적으로 심은하의 작품중 좋아하는 건 "미술관 옆 동물원"입니다.

부리 2004-12-31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스님/저는 갠적으로 폭스님을 조아해요

에피님/적절한 분석인 것 같습니다. 쉽게 끝내도 될텐데 뭔가 그로테스크하게 보이려고 애를 많이 썼더군요.

코마개 2004-12-31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주홍글씨 보고 황당했는데, 그리고 그렌져 트렁크 안쪽에서 열리거든요...

부리 2004-12-31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쥐님/앗 님의 차는 그, 그랜죠????

2004-12-31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12-31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4-12-31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마지막이네요.전 이 영화 좋아했어요.진짜 잘만든 멜로 영화였다고 생각해요.신구에게 한석규가 비디어 키는거 알려주는 것도 딱 멜로틱하죠...유영길 감독이었나...이젠 잘 기억도 안나는 촬영감독의 롱테이크...좋았아요.샷의 변화가 없어도 감정선을 탈 수 있는 연출로 훌륭했고.. 사진관에서 둘이 이야기하는 씬 이야기하는거에요.^^

내년에도 복많이 받으시고....좋은 일 많이 만드세요.

호밀밭 2004-12-31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지나갈수록 <8월의 크리스마스>만큼 볼 때마다 감동을 주는 영화가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드팀전님 말씀대로 유영길 촬영감독의 유작이었어요. 정말 촬영부터 연기, 대본 모두 좋았다고 생각해요. 두 사람이 스쿠터를 타는 장면, 같은 우산을 받고 가는 장면들 다 기억에 남아요. 내년에는 더 행복한 한 해 되시고, 건강하세요.

LAYLA 2004-12-31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영화는 안봤는데요...언어영역지문으로 많이 읽었어요. 이번 수능치기 몇달전부터 파이널 문제집에 이 시나리오가 집중적으로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영화 안보고도 줄거리 잘알아요 :-) 좋은 영화니까 많이 나왔겠죠? 보고싶어요....근데. 전요. 왜 심은하랑 고현정이랑 닮아 보이죠? 자매같아요


2005-01-01 1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春) 2005-01-02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6년쯤 전까지 살던 동네에서 사시네요. 저희집은 기흥성 모형공사 건너편 골목의 서교가든 근처였는데... 괜히 더 반갑네요. ^^;

하루(春) 2005-01-02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허진호 영화를 좋아하는데요. 그 이유는 굉장히 순진할 것 같은 인상을 풍기는 그가 영화는 꽤 쓸쓸하게 만들잖아요. 그런 그 사람의 정서가 좋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전 이 영화 말고 '봄날은 간다'도 좋아해요.

마태우스 2005-01-03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아, 봄날은 간다도 그사람 작품이죠! 맞네요. 참 쓸쓸한 영화만 만드는군요. 그리고 기흥성을 아신다니 반갑습니다

라일라님/오 이 영화가 수능에도 출제되는군요! 글구 심은하와 고현정이 닮아보이는 건 둘다 미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는...

호밀밭님/님과 얘기하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스쿠터 장면, 으음, 전 그것보다 비디오 트는 거 가르쳐드리는 게 더 기억에 남는다는...님도 새해에는 바라는 것을 이루시기를 빌겠습니다.

드팀전님/작년은 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깨우칠 수 있었던 한해였습니다. 올해도 변함없이 지도편달을^^

비로그인 2005-02-12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작년 가을인가, 그 때 첨으로 봤어요. 뭐, 잔잔하긴 하던데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취향이 워낙 좀 섬세한 면도 있고요, 감각적인 영상에 신경을 쓰기도 하고..암튼, 재밌긴 재밌었는데..그 때 열광하던 사람들의 분위기로 반해 제 취향은 아닌 듯 해요. 전 무조건 스릴러, 공포, SF! 이 세가지면 필요충분조건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