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병원이 생기면서 국내외 유명 의사들의 스카우트 붐이 불었다. 당시 서울대병원에는 이런 말이 나돌았다.

“삼성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못받은 사람은 팔불출이다”

미국서 유명한 심장내과 전문의였다가 그때 귀국해서 삼성으로 간 이원로 선생님이 결국 경제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다른 병원으로 옮기신 걸 보면 실제 삼성의 월급이 그리 많은 건 아니다. 하지만 재벌 중 재벌인 삼성의 이미지상, 생길 당시엔 병원을 옮기기만 하면 월급이 몇배는 오를 것이라는 게 보편적인 상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병원서 삼성으로 옮긴 분은 두명인가밖에 없었고, 그래서 서울대병원 사람들은 돈보다 명예를 숭상한다는 자평을 내렸었다. 실제로 그런 게 없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병원이라는 자부심은 월급 몇푼으로 살 수 없는 거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모르긴 해도 서울대병원에 있으면 촌지로 챙길 수 있는 돈이 받는 월급보다는 많지 않을까. 이명박이 입원했을 당시 서울대병원 선생님들이 보여주신 행태를 보면-물론 이건 들은 얘기다-그 선생님들이 오직 명예만을 추구한다고 믿기는 어렵다.


우리 아버님은 92년부터 A 교수와 인연을 맺었다(그 파트의 교수들 중 A 교수를 택한 것은 내 개인적 선호가 작용했다). 그리고 A 교수는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십년간 아버님을 책임지셨다. 회진을 제외하고 교수가 병실에 찾아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A 교수는 아버님이 입원해 계신 틈틈이 병실에 문병을 와주셨다. 궁금할 때마다 선생님의 방으로 찾아뵙거나 전화상담을 하는 특권도 누렸다. 내가 선생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난 아니라고 본다. 일년에 200명씩 졸업하는 마당에, 그들의 부모님을 전부 그렇게 봐줄 수는 없지 않는가. 난 그걸 우리 어머님이 드린 촌지 탓으로 본다. 아무리 어려워도 어머님은 선생님께 촌지 드리는 걸 거르지 않았고, 선생님 역시 한번의 거절 없이 촌지를 받았다. 설마, 촌지를 받는다고 환자 진료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지겠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건 많은 차이가 났다. 언젠가 중견재벌 한분이 별 대단치 않은 병으로 특실에 입원하셨을 때, 난 바쁘기로 소문난 B 교수가 친히 문병을 오셨다는 것에 놀랐다. B 교수가 나가기까지 나는 밖에서 30분이 넘도록 기다려야 했는데, B 교수님이 자신에게 특진 신청을 한 모든 입원환자에게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거라는 점에서, 중견재벌이 뿌린 촌지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교수가 관심을 갖는 환자라면 레지던트나 간호사들의 태도 또한 달라질 테니까.


난 지금 A 교수님이 나쁘다고 하는 건 아니다. 촌지만 받고 아무런 태도변화가 없는, 그러니까 초지일관 성의가 없는 교수님들도 많았기에 우리 가족은 진심으로 A 교수에게 감사드렸다. 내게 친히 전화를 해서 새로운 약이나 기계를 소개해 주기도 하는 등 A 교수가 없었다면 아버님이 그리 오래 사시지도 못했을거다. 그렇긴 해도 학생 때 느꼈던 존경심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예컨대 다음 일화를 보자. 어머님의 말씀이다.

“A 선생에게 촌지를 평소보다 더 많이 줬거든. 그랬더니 굉장히 감동을 했나 봐. 주고나서 얼마 있다가 전화가 왔어. 아버님이 어떤 상태라고 말해 주셨는데, 아무래도 받고나니 미안했나봐”

아쉬운 것은 99년, 아버님이 일년 내내 입원을 하시면서 매달 내야 할 병원비가 장난이 아닌 상태가 되었어도 A 교수는 여전히 촌지를 거절하지 않았다는 거다.

“입원비에 보태 쓰세요”라고 한번쯤 해주셨다면, 그런다고 어머니가 촌지를 다시 거둬가지 않았겠지만, 우린 그 교수님을 더 존경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또 있다. A 교수의 전례없는 배려가 오직 촌지 때문만이 아니었다면-물론 나도 그건 아니라고 믿지만-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한번쯤 빈소에 와주셨어야 했다. 어머님이 아버님 사후 한번도 그 선생을 찾아뵙지 않은 것도 그때 느낀 서운함 때문이었다. 12월 24일이라 여러 가지로 바쁘셨을 테지만, 그래도 같은 병원 내 영안실에 있었는데 왜 오시지 않았을까. 몰랐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설사 몰랐다고 해도, 나중에 전화라도 한번 해주실 수는 있었을텐데. 그랬다면 우린 모든 걸 다 잊고 선생님을 다시 존경할 수 있는데 말이다.


오는 12월 23일이면 아버님의 3주기가 된다. 어머니는 형제들, 친척들과 이런저런 얘기들을 할 테고, 작년, 재작년에도 그랬듯이 A 선생님 얘기도 나올 것이다. A 선생님 귀가 가렵지 않을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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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2-17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그나저나 신춘문예 후기담을 올려 주셔야죠.아참 뉴스레터하고 삼류소설이 읽고 싶어요!!^^(연말 압박)

모과양 2004-12-17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저희 학교에 지금은 은퇴하신 간호과장님이 오셔서 "저희 서울대학병원 간호부는 이제부터 촌지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다른 내용)... 의사 앞의 봉투에는 3백만원씩 들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두 그런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관행처럼 이루어 지는 것도 사실입니다..........(다른 내용).........." 해서 놀랐던 적이 있어요.

marine 2004-12-17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촌지,참 우울하네요 저희 아빠도 심장병으로 수술하신 뒤 대학 병원에 정기검진 가시는데 명절되면 꼭 상품권이라도 챙기시더라구요 이 정도면 촌지라고 해야 할까요, 그냥 감사 인사라고 해야 할까요?....

oldhand 2004-12-17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저는 반평생 살아오면서도 병원을 가까이 할 기회가 없어서인지 병원내에서도 이렇게 촌지가 일상화 되어 있는지 몰랐습니다. 촌지 문화.. 이젠 정말 바꿔야 할 때가 아닐까요? 그런데.. 그런 문화를 바꾸자니 어디서 부터 시작을 해야 하나 막막하군요.

노부후사 2004-12-17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마태님. 익명이긴 하지만 그렇게 주위를 비판하셔도 발 밑이 안전하신가요? ^^ 비판이라는 게 특히 그 화살이 주위 사람에게 향할 수록 어려운 법인데, 마태님은 너무 초연하신 것 같아서요. 사뭇 존경심이...

마냐 2004-12-17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모과양님의 댓글에 더 놀랐슴다. 촌지 수준이 그 정도란 말임까? 참, 살기 어렵군요...쩝.

LAYLA 2004-12-17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원에도 촌지가 있단걸 처음 알았습니다. 기를 쓰고 의사 하려는 이유가 다 있겠죠.

비로그인 2004-12-18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에 촌지를 받지 않겠다!

이런 내용은 없는 걸까요?

paviana 2004-12-18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엄마가 망막박리로 서울대병원에서 제가 초등학교 6학년때,고등학교1학년때,대학졸업하고 3번 이재흥선생님한테 수술받았거든요..저희두 2번째 수술까지는 촌지를 했어요..간호사실에 선물두 전부 돌리고...근데 맨 마지막 수술때는 암것두 안했답니다.계속 병원을 다니다 보니 선생님이 오히려 저희엄마를 챙겨주시고,그러다보니까 다른 그 아래선생님들도 소홀히못하고요..요즘도 그선생님이랑 엄마는 간혹 통화하시고, 선생님이 오히려 저희엄마한테 밥을 사주신답니다...고마우신분이지요...

마태우스 2004-12-18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아나님/의사 환자 관계가 그렇게 발전할 수도 있군요... 그나저나 어머님이 자주 망막박리가 되시네요?? 무슨 다른 질환이 있으신 건 아니겠지요??? 그거 수술하고 나면 엎드려서 있어야 하고 참 힘들던데....

고양이님/그런 조항은 없는 듯해요. 그보다 제가 학생 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외우고 있는 친구는 없었던 것 같네요. 그걸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았고, 동상에 써있는데 읽는 친구도 많지 않다는...나만 그랬나??

라일라님/어머 모르셨단 말이죠... 근데 의사 하려는 건 꼭 그것 때문이 아니어요. 취직이 잘되고 등등....

마냐님/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지고 있다는....어찌되었건 세상 살긴 힘들어요

에피님/글쎄 마리어요 이거 지인들이 볼까봐 걱정되긴 해요^^

올드핸드님/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님이 모르시면 누가 압니까. 빨리 대책을 마련하라!! 마련하라!

나나님/상품권이야 귀엽지요..라고 하려다가.... 사실 그것도 현금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모과양님/앗 님은 규모까지 밝히셨군요^^

검은비님/귓밥도 많다는 소문도...^^

여우님/님의 독촉 때문에 어제 뉴스레터 만든 거 아시죠??

sweetrain 2004-12-20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촌지는 고사하고 자기 카드로 어머니 입원비 대신 내주고 나중에 갚으라고 하시던..거따가 퇴원할 때 영양제까지 바리바리 싸주시던 그 의사 선생님은 참으로 성인이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