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12월 3일(금)



누구랑?: 친구들과



마신 양: 겁나게 많이






일년에 한번, 난 내 은사님을 모시고 천안에 강의를 간다. 우리 세계에서는 그걸 ‘모신다’고 부른다. 아침 일찍 선생님 댁으로 가서 선생님을 태운 뒤 천안에 가서 점심을 대접하고, 선생님 강의가 끝나면 다시 댁으로 모셔 드리며, 강사료까지 지급하니 ‘모신다’는 말이 맞긴하다. 하지만 말도 안되는 내 강의에 길들여진 학생들에게 수준 높은 강의를 제공하고, 그 강의를 들으면서 나도 많은 것을 배운다는 점에서 그렇게 할만한 가치는 분명 있다.






어제, 선생님을 댁에 내려드리자 피로가 몰려왔다. 다섯시간이 넘게 운전을 해서가 아니라, 그 동안 나이드신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는 게 나로서는 버거운 일이다. 그때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집 근처에 모여 있으니 술한잔 하자고. 사실 난 어제 술을 마시면 안됐다. 오늘 아침, 천안에서 특강이 있는데 그 준비를 해야 했으니까.






이번주 초, 입학관리처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천안고에 입시설명회를 가는데, 한시간 정도 특강을 해달라고. 주제는 뭐라도 좋으니 재미있게만 해달란다. 내 강의가 재미있다고 누가 추천을 했단다. 사실 내 강의평가가 좋게 나오는 것은 내가 제시간보다 빨리 끝내는 몇 안되는 의대사람이기 때문이지만, 그걸 모르는 누군가가 날 추천했나보다. 그 순간부터 나의 가슴뜀은 시작되었다. 뭘 강의할까. 기생충? 그걸 누가 재미있어할까? 수능이 끝나고 나서 지겹게 시간만 떼워야 하는 학생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뭔가 색다른 주제여야 되지 않을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난 강의주제를 정했다. ‘유머의 길’,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터득한 유머의 원칙을 담담히 기술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난 어젯밤, 그 강의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루 동안 쌓여버린 피로가 나로 하여금 술을 땡기게 했고-하기사, 내가 술이 안땡길 때가 어디 있담?-난 친구들과 겁나게 많이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실수록 다음날 강의가 두려워졌고, 그래서 술을 더 급히 들이켰다. 술에 취해 집에 왔을 때 난 무서워서 잠이 안올 지경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안 사실이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아는 분 중 가장 유머가 뛰어난 분에게 문자 메시지를 날린 것도 두려움을 이겨보자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오늘 아침, 기차에서 강의를 할 내용을 열심히 적었고, 천안고에 도착한 뒤 인적이 드문 매점에서 연습을 했다. 수능-그땐 학력고사-을 보던 날 아침, 난 너무 무서워서 펑펑 울었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오늘 아침에도 난 무서웠다. 뭐가 무서울까? 내가 하는 강의가 안웃길까봐.






10시를 조금 넘어 연단에 올랐다. 그전까지 졸거나 심드렁해있던 아이들은 내가 올라간 뒤에도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내가 기대한 반응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이쯤해선 웃겠지 싶을 때도 작은 웃음만이 강당에 울려퍼졌다. 애들이 제대로 웃은 건 세 번 정도? 땀이 났다. 그래도 6년간 강의를 해본 데서 기인한 뻔뻔함으로 강의를 겨우 마쳤다. 밖에 나가니 하늘은 잿빛이었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웃기진 않았지만 내 강의가 학생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진 않았을까, 라는 허황된 생각을 해본다. 어찌되었건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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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12-04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은 웃기시려고 할 때 보다, 그 반대 일 때가 더 웃겨요 ! 크ㅡ?

마태우스 2004-12-04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 매직님/흑 그건 너무 잔인한 말이어요!!!! 피, 더 노력해서 아주 웃기는 사람이 될테야!

sweetmagic 2004-12-04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노력 안 하셔도 충분히 재미있으시다는 말인데 ~ ! 흥 ! 웃겨 !! ㅋㅋㅋ

chika 2004-12-04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힛~!

조금 꿀꿀한 기분으로 글을 읽었는데, 막판에 웃겨버립니다. ^^d

미완성 2004-12-04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그 학생들 앞에서 빨간 딱지가 붙은 화질 좋은 테잎을 상영해주거나, 그 상영수준에 달하는 음담패설이 오가지 않는 한 님에게 보인 반응 이상을 얻기는 어려웠을 거라 생각됩니다.

안 좋은 일은 얼른 잊는 것이 상책이예요. 철없는 아이들 생각은 고만 하시고, 비도 오는데 막걸리에 김치전, 어떻습니까 *.*

니르바나 2004-12-04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니까 개그맨들도 자기의 개그가 통하지 않으니까 웃음을 강요하더군요.

이게 직업인 사람들도 힘든게 이 일인데 뭐 그 정도가지고 심란해 하시나요.

그래도 세번이나 웃끼셨는데...

잘 하셨습니다.

다음번에는 5번 웃낄것을 목표로 준비하세요. 마태우스님

하얀마녀 2004-12-04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학생들, 유명인사를 몰라봤다고 나중에 후회하겠죠.

stella.K 2004-12-04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웃기는 건 어디서 나올까요? 전 별로 웃기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웃기다고 하는 사람도 있구요. 난 정말 웃길거야 하면 사람들 안 웃을 때가 있어요. 그래도 천안고 아이들 중 몇몇은 마태님을 정말 웃기다고 할 사람이 있을 거예요. 너무 상심 마시길...

근데 은사 모시기 전통 그거 꽤 괜찮에요.^^

노부후사 2004-12-04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안고면 제가 나온 학교군요.

후배들 불러다가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ㅋㄷㅋㄷ

어항에사는고래 2004-12-04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났을 터인데 괜한 겸손? 하얀마녀님말처럼, 분명 고 녀석들 나중에 후회할겁니다. 글을 읽고도 이렇게 재미있는걸요.

마냐 2004-12-04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이리 재미난데..겨우 3번 웃었다니...ㅋㅋㅋ 마태님, 님의 내공 탓이 아니라, 걔들이 좀 별난거 아닐까요?

니나 2004-12-05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생들을 세번이나 웃기다니! 그 이상은 욕심이십니다 ㅋㅋ

마태우스 2004-12-06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멕베스님/그, 그런가요??? 괴로워할 필요 없는거죠??

마냐님/하필 제가 별난 애들을 상대로 특강을 했단 말이죠..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지요??

고래님/반응이 없어서 죽고싶었구요 겸손 아네요.....전 말보다 글인가봐요 흑흑

에피님/아이고 적나라한 반응을 들을 수 있겠군요^^

스텔라님/저처럼 유머에 재능이 없는 사람은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마녀님/아이 저 유명인사 아네요 앞으로두 그렇구요^^

니르바나님/3번으로 만족하라구요???? 흑, 30분 넘게 강의하는 중에 겨우 세번이면 너무한 거 아닌가 싶은데..

사과님/음담패설도 하나 했어요. 흑흑...

치카님/치카님같은 분이 그 강당에 20명만 계셨어도...흑

매직님/어머 제가 오해를... 호호호, 역시 매직님밖에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