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에 놀라서 잠을 깼다. 꿈 때문인지, 아니면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 때문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일어나자 학생들은 떠들기를 멈춘 채 날 바라본다. 한 학생이 컵에 물을 담아서 내게 건네준다. 갑자기 어젯밤 일이 떠올라 날 부끄럽게 한다. ‘어제 너무 마셨었지...’


예과생들이 MT를 간다기에 저녁 7시쯤, 예과 조교과 함께 MT지를 찾았다. 학생들은 벌써부터 숯불에 삼겹살을 구워먹고 있었다. 그중 한곳을 비집고 들어가 섰다. 그리고는 소주와 함께 삼겹살을 먹었다. 김치가 떨어져 쌈장에 찍어 먹어야 했지만, 숯불에 굽는 고기의 맛은 언제나 일품인지라 오는 길에 조교와 저녁을 먹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양이 내 입으로 들어갔다. 소주와 함께. 하지만 난 너무 술을 많이 마셨나보다. 학생과 시소를 타고, 방에 들어가 말뚝박기를 같이 한 건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을 보니 새벽 두시반, 잠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입고온 잠바를 찾았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책을 보려고 빈방을 찾아 들어갔다. 벽장에서 이불을 꺼내 자리에 누웠다. 불을 안뗀 방이라 겁나게 추웠다. 가방에서 <무진기행>을 꺼냈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전집을 지난달에 큰맘먹고 샀었는데, 드디어 읽을 차례가 된 것. 진작부터 김승옥의 화려한 명성을 들어온 터였다. 쓰고난 뒤 40년이 지나도록 인구에 회자되는 책이 몇권이나 될까. 내 생각과 달리 <무진기행>은 단편이었다. 책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는 그 소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로 시작하는 <무진기행>을. 소설은 재미있었지만 그 방에 깃든 추위를 잊게 해줄 만큼은 아니었다. 40페이지의 짧은 소설이었지만, 자자한 명성에 주눅이 들어서인지 책장을 빨리 넘기지 못했고, 다 읽었을 때는 새벽 4시가 막 지나 있었다. 그제서야 밖에서, 혹은 방 안에서 놀던 학생들이 방 안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추위를 견딜 수가 없었던 난 아무 방이나 들어갔고, 거기 이불을 펴고 누운 채 잠을 청했다.


<무진기행>이 쓰여진 것은 1964년, 작가가 겨우 23세에 불과한 때였다. 훌륭한 소설의 기준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무진’에 가보고 싶어지는 걸 보면 ‘훌륭한 소설’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능력이 있으니 이어령이 그를 비싸디 비싼 호텔 방에 가두고 “아무 글이나 써라!”고 했을 것이다. 김승옥이 하느님을 만난 것은 그 자신에게는 행운이었을 지언정, 더 이상 그의 글을 읽지 못하게 된 우리에겐 불행한 일이었다. 신을 믿으면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게 되는 이유를 난 이렇게 본다. 소설을 쓴다는 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 그래서 소설가는 하나하나가 다 창조자며, 신이 된다. 그러니 하느님을 믿게 되면 소설을 더 못쓰는 게 아니겠는가.


집으로 오는 길에 그의 다른 단편을 읽기 시작했다. 인도에서 책을 보면서 걷다가, 갑자기 나타난 트럭과 그만 부딪힐 뻔했다. 인도에 직각으로 세워진 트럭이라니. 부딪혔다면 무지하게 아팠을 테고, 그랬다면 아마도 소설을 너무 재미있게 쓴 김승옥을 원망했을텐데, 뛰어나기로 유명한 내 순발력이 천재작가를 괜시리 미워하는 걸 막아 주었다. <무진기행>의 명성을 확인할 때마다 ‘언젠가는 읽어야 할텐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읽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 그렇다 해도 그 방은 너무 추웠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굼 2004-11-20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가 들어가서 브리핑에서 '무진기행'이 보이질 않네요;; 그냥 '을 읽다'로만 보인다는;

마태우스 2004-11-20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굼님/앗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

하얀마녀 2004-11-20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들과 함께 시소를 타고 말뚝박기를 하시다니... 너무 멋진 교수님 아닌가요? ^^

니르바나 2004-11-20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겁나게 추운 방에서 주무신 마태우스님, 혹시 감기는 걸리지 않으셨나요?

감기는 잘 옮기는데...특별히...

그나저나 23세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한 번 생각해 보아야 겠군요.

플라시보 2004-11-20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책보면서 걷지 마세요. 저 그러다가 한번 죽을뻔 했어요. (골목 옆에서 튀어나온 차가 정말 제 골반뼈 바로 앞에서 멈췄어요. 휴우~) 그리고 추운방에서 책을 보시다니. 마음이 저립니다.라고 말하기엔 숫불에 구운 삼겹살을 드신게 너무 부러워요. 에잇..^^

파란여우 2004-11-20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6세 미녀께서 감기약을 사 주실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oldhand 2004-11-20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6세 미녀에게 뽀뽀라도 했다간 감기를 옮길수도 있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

하이드 2004-11-20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승옥 전집 사셨군요. 얼마전에 친구랑 서점에서 보고 학교 교과서에 나오고 수능문제 단골로 나왔던 '무진기행' 의 추억(?) 을 떠올렸더랬는데 ^^

연우주 2004-11-20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무진기행 그리 재미없었는데...^^ 김승옥 소설이 저에겐 별로 잘 맞지 않더군요. 마태우스님은 재미있으셨단 건가요? ^^

마태우스 2004-11-21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주님/어 전 재미있던데요? 참, 우주님께 치과 소개해드려야 되는데...

미스하이드님/음, 그 소설이 수능에 단골로 나왔군요. 안좋은 추억이신가봐요??

올드핸드님/손만 꼭 잡고 있을께요^^

여우님/아마 그러겠지요? 마음씨도 자상하니깐요^^

플라시보님/숯불에 구워먹는 삼겹살은 정말 환상적입니다. 제가 오죽하면 여든한점이나 먹었겠어요.

니르바나님/제 나이에는 감기 조심해야 할텐데 왜그랬을까요. 더구나 전 홀몸도 아닌데^^

하얀마녀님/그, 그게요...말뚝박기할 때 전 그냥 올라타기만 했어요....애들은 제가 얄미웠을지도....

2004-11-24 0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6-04-23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석사논문 쓰다가 안 풀릴때마다 알라딘 들어와서 마태우스님 술일기 읽습니다 ^^ 얼마나 안풀리던지 벌써 155번째 까지 읽었습니다. 읽을때마다 얼른 석사논문 마무리짓고 저도 친구들과 우화등선할 때까지 마시고 싶어서 감질납니다 ㅜㅠ 흑 다음주 수요일이면 최종심사 제출이네요...
김승옥은 그 문장이나 감수성이 혁명이라고 불렸지요. 저는 <서울, 1964 겨울>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서울= 1964 겨울이라는 울림. 1964년 서울은 겨울이었다는 것. 제목만해도 벌써 시적이지요? 흠. 서울은 계절 중에 겨울이랑만 韻이 맞네요. 쩝; 봄과 운이 맞는 도시에 살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