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본문 내용과 약간 관계있음.

학회에 다녀왔다. 한창 연구의 재미에 빠져 있던 조교 시절엔 학회 가는 게 마냥 좋기만 했다. 무슨 소풍이라도 가는 기분이랄까. 사람들이 자신의 연구성과를 발표하는 것도, 발표 후에 벌어지는 질문공세를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여러 사람 앞에서 내가 발표를 하는 것 역시 스릴 넘치는 일이었지만, 가장 좋았던 건 학회 전날 모여서-지방서 학회를 하면 전날 간다-술을 마시는 거였다. 십여년이 흐른 지금, 난 학회 가기가 무섭다. 왜? 다른 사람들의 발표가 워낙 훌륭해서. 그리고 난 변변히 발표할 게 없어서.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학회는 철저히 양극화되었다. 발표를 하는 사람만 발표를 하고, 질문하는 사람도 죄다 같은 사람들이다. 뭘 알아야 질문을 하지! 90년대만 해도 별 거 아닌 연구결과-저걸 왜 했지?-를 발표하는 사람도 제법 됐다. 어떤 분의 발표다.

93년; 이 물고기를 잡았더니 70%에서 기생충이 나왔다

94년: 저 물고기에서는 50%에서 기생충이 나왔다.

95년: 그 물고기에서는...

속으로 생각했다. “학자가 아니라 어부같아!”

그런 자료가 의미가 없는 건 아닐 테지만, ‘연구’라고 불리기엔 너무 머리를 안쓴 일이고, 새로울 것도 하나 없었다.


하지만 어제 발표된 것들은 대개 이런 식이다.

“이 기생충이 갖고 있는 유전자의 기능을 알아보기 위해 그 유전자를 재조합해 다른 세포에 심어서 단백질을 만들게 한 뒤...”

“이 기생충이 숙주세포와 접촉한 후 막에 있는 단백분해효소의 인산기를 떨어뜨림으로써 그 효소를 활성화시키는데, 이러한 세포 내 신호전달체계에서...”

분자생물학의 발달은 예전에는 할 수 없던 연구들을 가능하게 했고, 그 결과 “우와--” 하고 감탄이 나올만한 발표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나이드신 분들은 그런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채 경탄에 찬 눈빛만 보낸다. 물론 젊은 애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강당에선 학회 발표가 한창이지만, 학회장 밖 다과 코너에선 몇몇 애들이 모인다.

A: 야, 정말 기죽어서 못살겠다.

나: 그러게 말야. 인간이 어떻게 저런 연구를 할 수 있는거지?

B: 말세야 말세...우리같은 사람은 어찌 살라고...


웬만한 게 아니면 발표를 할 수 없는 무서운 현실, 그 현실 앞에서 우린 좌절한다. 학회 초록집의 발표자 란에서 내 이름을 보는 건 점점 힘들어지고, “넌 왜 발표도 안해?”라는 말을 수시로 듣다보니 학회 가기도 싫다. 그래도 내가 학회에 가는 건 학회라도 가야 공부해야겠다는 자극을 받기 때문이지만, 그런 게 계속 반복되니 내 마음도 무뎌지는 듯, 자극은 안되고 낙담만 할 뿐이다.

2001년, 학회 연단에 선 난 이렇게 발표를 시작했다.

“몇년만에 다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제가 재기의 발판으로 삼은 기생충은 동양안충인데요...”

그 뒤 벌써 3년이 지났다. 난 언제쯤 그 자리에 다시 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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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10-30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과장님 정말 과장 맞습니까?? (간만에 너무 쌨나?? ^^::)

sooninara 2004-10-30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1년이면 벌써 3년전인데..(뽁스 우리 왜 이러니?)

플라시보 2004-10-30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뭐 님이 버티고 싶으시다면 계속 그렇게 잘 버티실수 있겠지만.^^ 보아하니 속으로는 발표도 하고 싶고 연구도 하고 싶어하시는것 같은데 이참에 어금니 한번 깨무시죠. 흐흐 (지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하기는..캬캬)

nugool 2004-10-30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알고 있어요. 지금 장기적으로 어마어마한 연구를 하고 계신 중 이라는거...^^

파란여우 2004-10-30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지야! 너네 아빠 요새 무슨 논문 쓰는지 너는 다 알고 있지? 흐흐...

비로그인 2004-10-30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녀와 기생충의 상관관계에 관한 마태우스 철학파의 심리분석에 입각한 진지 고찰'
을 연구하시는게 아닐까요? (웃음)

LAYLA 2004-10-30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생충의 세계는 무궁무진 한것이군요 놀랍습니다.
그리고 기생충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찬 학자들!!!!!!!! 새로운 세계로군요!

니르바나 2004-10-30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학회네요.
학회 구성원이 내과같이 크지 않으니 가족같은 분위기이겠군요.
소박하게 다과 코너도 보이고요.

mannerist 2004-10-30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쩝... 죽어라 계속 공부만 할 줄 알았던 작년 이맘때 학회 다녀온 게 기억나는군요. 운때가 잘 맞아 학교 교수님 소개로 진짜 책에서만 보던 이름들 실제로 보면서 발표 듣고, 관심 분야의 대학원생들 발표에 괜히 딴지 걸고... '방향전환'을 한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기울인 노력만큼 공부하지도 않는군요. 공부해야겠습니다. -_- 서과장님도 화이팅!

조선인 2004-10-30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학회 때문에... 서재를 저버리진 않으실꺼죠?

sweetrain 2004-10-30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이팅!! 마태님, 감사합니다...ㅠ.ㅠ

oldhand 2004-11-01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문도 영어로 하면 페이퍼인데, 페이퍼 달인 마태우스님의 훌륭한 페이퍼들이 있잖아요!!

노부후사 2004-11-01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양안충이란 무엇인가요?

마태우스 2004-11-02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피메테우스님/그건 말이죠, 눈에 사는 벌레죠. 초파리가 옮기는 기생충입니다. 그래도 꽤 발견되죠 아마.
올드핸드님/하하, 페이퍼라... 평소 직업을 네티즌이라고 생각해 오던 차에 님의 말씀을 들으니...하하.
단비님/뭘요 별거아닌데...^^
조선인님/서재 때문에 학회를 저버릴 수는 있을 것 같아요^^
따우님/아아 님의 추천에 힘이 무럭무럭 납니다
매너님/겨, 결론은 역시 공부...거기에 저까지 물고 늘어져서 공부를 시키려 하시다니... 으음.... 확 공부해 버릴까?
니르바나님/다과 코너야말로 제가 가장 애용하는 코너입니다^^ 울 학회, 훌륭한 학회 맞습니다. 가족적이고 발표 수준도 아주 높아요
라일라님/찾아보면 할 일이 많긴 해요. 하지만...찾지를 않으니 제가 이렇게 놀고 있는 겁니다. 오오 통재라...
체셔고양이님/미녀와 기생충의 상관관계를 연구하고 싶긴 해요. 그럼 미녀를 많이 만날 수 있잖아요^^
여우님/벤지도 알까요?? 영리한 녀석이니까 알지도^^
아이 너굴님, 맨날 그렇게 칭찬만 해주시니 제가 몸둘바를.... 사실 연구는 안하고 조그만 책을 쓰고 있다는...
플라시보님/하고픈 맘이야 굴뚝이죠. 다들 저를 이렇게 봐요. "쟨 뭐하나.."
수니친구님/친구의 우정어린 조언을 달게 받겠습니다
폭스님/으윽...또 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