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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역 앞에 있는 피씨방이다. 죽을 힘을 다해 뛰어서 2분 전에 도착했건만, 믿었던 기차표는 이미 매진이란다. 앞으로 한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한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만화방에 갈 수도 있지만, 난 방금 본 <콜라터랄>의 리뷰를 쓰기로 했다.
11월 1일과 2일, 우리 학교는 인정평가라는 걸 받는다. 우리 대학의 실상을 외부에서 평가하는 건데, 체중을 잴 때는 목욕도 하고 살도 좀 빼는 것처럼, 우리 학교도 이왕이면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매일 회의에 끌려가는 것도 다 그 때문이고.
평가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의전 절차, 우리 학장님은 평가단이 도착하면 꽃을 한송이씩 달아 주잔다. 내가 하면 기분이 나쁠 테니 학생들을 부르자는 것. 그래서 난 예과 1학년 대표에게 부탁해 7명을 선발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잘 못하고, 부탁을 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뤄주는 내 성격상, 난 오늘 그네들을 불러 중국집에서 비싼 음식을 먹였다. 걔네들은 안그래도 된다고 하지만, 그래야 내 맘이 편하니까.
밥을 먹고나서 슬슬 기차를 타러 가려는데, 여학생 하나가 이런다. "약속이 7신데, 그때까지 뭐하지?"
그런 걸 그냥 못보는 나, 같이 영화라도 보자고 권했고, 둘이 보면 행여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남학생 하나를 꼬셨다. 중구집에서 나오는 요리마다 쿨한 반응을 보였던 그는 영화에 대해서도 큰 뜻이 없는 듯했다.
나: 영화 좋아해요?
그: 별로요
나: 좋아하는 연예인은?
그: 없어요.
하지만 난 결국 그를 끌고 영화를 봤고, 시간대가 안맞아 기차 예약도 하지 못한다. 그 바람에 9시나 되어야 집에 도착할 것 같지만, 영화가 그런대로 괜찮아서 후회는 없다.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을 몇가지만 쓴다.
-주연을 맡은 톰 크루즈는 사실 우리 시대의 배우다. 그네들도 그를 모르진 않지만, 그들은 톰 크루즈보단 드카프리오가 '시대 배우'가 아닐까. 나이가 들어도 멋지기만 한 톰 크루즈를 보고도 여학생은 별반 반응이 없는 듯했으니까.
-영화 중간에 난데없이 <주유소> <스넥샵> <커피> 같은 우리말 간판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익숙해져 나중에 <순두부> <월남국수>가 나올 때는 웃기까지 했다. 아직도 난, 외국 영화에 우리말이 나오면 반갑다.
-헌재에서 쓸데없이 위헌심판을 하는 바람에 전날 세시에 잤다. 당연히 무지하게 졸렸다. 하지만 자지 않고 끝까지 본 걸로 봐서 영화가 재미있긴 했나보다. 쿨하기만 했던 남학생도 "매우 철학적인 영화였다"고 흡족해했는데, 글쎄다. 액션영화에 무슨 철학이 그리 많이 들어있었을까.
-등장인물이 들려주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일화다.
[젊은 커플이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했지. "안녕하세요?" 마일스가 대답했어. "닥쳐, 멍청아! 저 계집과 꺼져"]
그는 그걸 대단한 일화라고 소개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어떻게 된 것 같다. 하지만 마일스가 그러고도 멀쩡할 수 있는 건, 그가 재즈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가의 기행에 아주 관대하다.
-택시기사의 어머니에게 문병을 갈 때, 탐 크루즈는 꽃을 사간다. 필요없다는 기사의 말에 크루스의 대답, "아홉달간 뱃속에 널 넣고 다녔어"
글쎄다. 그거야 맞지만, 어릴 적 꽃은 이산화탄소를 내뿜어 해롭다고 배웠는데 왜 문병을 갈 때마다 꽃을 사갈까. 서울대병원 1층에는 문병객들로부터 압수한 꽃들이 언제나 장사진을 이루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꽃을 산다.
-옛날에는 악당이 언제나 험악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악당도 다, 아니 더 잘생겼다. 그러니 영화볼 때 형사보다 살인범을 더 응원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나처럼 생긴 사람은 이제 설 땅이 없다.
가슴도 제법 뛰고, 긴장도 되는 재미있는 영화였다. 나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