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목에 영세가 들어가긴 하지만 내 페이퍼랑은 좀 관계가 없는 듯..
알라딘 번개를 위해 괜찮은 맥주집을 물색하러 다닌 적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괜찮음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우선 조용해야 한다는 것. 시끄러운 음악이 나오는 곳은 난 딱 질색이다. 손님이 없어서 열명 이상이 들어와서 시끄럽게 떠들어도 괜찮은 곳. 이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예약 없이 와도 열댓명의 자리를 만들 수 있을만큼 사람이 없는 곳. 그리고 술값도 모두가 수긍할 수 있을만큼 저렴해야 한다는 것. 이런 곳을 나는 ‘영세한 집’이라고 부른다. 손님이 없어서 돈을 별로 못벌고, 주인도 손님을 더 끌 마음이 없어 보이는, 그래서 열명이 가서 맥주 3천만 먹고도 맘편히 나올 수 있는 그런 곳....
이런 조건에 맞는 집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홍대역 부근에 있는 술집들은 너무들 시끄러웠고, 홍익대 정문 쪽에 있는 곳은 하나같이 비쌌다. 얼마나 걸었는지 허벅지가 2센티는 굵어졌을 무렵, 난 바탕골 소극장(이게 아닌데...뭐였더라?) 옆에 있는 맥주집을 발견했다. 지하에 있는 게 흠이긴 하지만, 사람이 한창 많을 금요일인데도 가게 안이 텅 비어 있다는 건 그곳이 내가 찾던 바로 그곳이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한눈에 느낌이 와서 명함을 받아놨다.
대망의 번개날, 우린 가게 안에 있는 큰 자리에 둘러앉아 즐겁게 맥주를 마셨다. 알라딘 분들도 대체로 만족한 듯해서 준비한 나도 기분이 좋았다. 가격도 뭐 그정도면...
총선날, 난 두 번째로 그집을 찾았다. 내 주위 사람 중 몇 안되는 탄핵 반대자와 함께. 휴일임에도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그녀와 난 개표방송을 보면서 수다를 떨었다.
내가 낀 조직에서 추진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기 위한 회의가 엊그제 있었다. 지난번엔 다른 회사의 사무실을 빌려서 회의를 했었는데, 그 회사 사람들이 밤 늦게까지 퇴근을 안하고 왔다갔다 했던 게 난 좀 마음에 걸렸었다. 그래서 “내가 아는 맥주집이 있는데...”란 얘기를 했고, 엊그제는 거기 가서 회의를 한 것. 그 집에 가면서 내가 제일 걱정했던 것은 그집이 망했으면 어쩌나 하는 것과, 내가 찜해둔 자리에 다른 손님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것.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그집은 언제나처럼 빈 상태로 우릴 맞았다. 그래서 우리 여덟명-아홉명이던가?-은 맥주를 마시면서 진지하게, 혹은 유쾌하게 회의를 했다. 술자리는 밤 12시 반까지 진행되었는데, 다들 만족한 듯했다. 한명이 저녁을 안먹고 와서 김치볶음밥을 시켰다. 맛보다는 정성이 뻗치는 그런 식사, 화장실도 그런대로 괜찮으니 흠잡을 게 없는 집이다. 그런데 왜 남들은 아무도 안가는 걸까.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게 나만의 취향인 것일까.
지금까지 내가 잘가던 영세한-즉 손님이 없는-곳들은 다 오래지 않아 문을 닫고 말았는데, 이 집도 그러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미약하나마 나라도 열심히 가서 문을 닫지 말라고 사정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