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담이란 사람, 나보다 저금액이 더 많구나...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다들 아는 거겠지만, 내 씀씀이는 헤프다. 아니 헤프다는 표현도 부족한 듯싶다. 돈을 벌기 시작한 조교 때부터 내 캐치프레이즈는 ‘버는 것보다 10% 더쓰기’였으니까(참고로 그때는 10% 일 더하기 운동인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집에다 얼마 드리는 걸 제외하곤 전부다 쓴다.
변명을 하자면 이렇다. 내가 나 혼자 잘먹고 잘살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잘 먹이자는 거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정신을 구현하는 거다, 게다가 내가 돈을 써야 우리 경제가 살지 않느냐, 미래를 위해 저축한다는데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희생하는 건 말이 안된다... 내가 쓰는 돈의 대부분은 물론 술값이다. 나보다 돈을 훨씬 잘버는 사람일지라도 난 그냥 얻어먹는 법이 없다. 대부분 가정이 있는 그들에게 난 “니가 무슨 돈이 있니”라며 내가 내버린다. 그게 난 마음이 편하다. 남이 산다면 마음대로 못시키지만, 내가 사면 원없이 음식을 시킬 수 있으니까.
이왕 사는 거, 난 음식을 배부를 때까지 먹이는 걸 좋아한다. 1인분을 덜 시켜서 애들로 하여금 탄 부스러기를 주워먹게 만들기보다는, 배가 터지게 먹고도 고기 몇점이 석쇠에 남아있는 걸 바란다. 난 이걸 아버님으로부터 배웠다.
“이천원을 아끼면 이왕 쓴 만원까지 버리는 거다. 하지만 이천원을 더 쓰면 그는 잘먹었다고 너한테 고마워할거다”
그러니 내가 밥을 사는 날엔 꼭 이런 말이 들린다.
“넌 이거 책임지고 먹어! 누군 좋아서 먹는줄 알아?”
혹자는 내가 재벌2세라서 이런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같은 집에서 자란 누나나 여동생이 십원 한 장에도 벌벌 떠는 걸 보면 환경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까지 빚을 지거나 신용불량자가 되진 않았으니 ‘과소비’로까지 매도할 건 아니겠지만, 씀씀이가 헤프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난 그 원인을 내 성장 과정으로 돌리고 싶다.
고교 때까지 난 용돈이라는 걸 받은 적이 없다. 필요하면 어머님께 말씀드려 돈을 타 썼고, 혹시라도 돈이 남으면 어머님께 갖다 드렸다. 내 수중에는 언제나 돈이 십원 한 장 남아있지 않았다. 학교는 걸어서 갔고, 점심은 도시락을 먹었으니 돈이 없어도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난 초등학교 때 학교와 우리집 사이에 있는 떡볶이집을 자력으로 갈 수 없었고, 중학교 매점에서 200원짜리 햄버거를 사먹는 애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었다. 중학교 때, 맨날 얻어만 먹는 게 미안해 어머님께 말씀드렸더니 한번 사라고 2천원을 주셨다. 난 그간 날 먹여살려준 친구들에게 떡볶이를 샀고, 800원을 거슬러 드렸다. 친구는 내게 “어떻게 거스름돈을 돌려주냐”며 날 착하다고 칭찬했지만, 나로서는 그 말이 이해가 안갔다.
그렇게 착하던 난 대학에 가고 여자를 만나면서 조금씩 변해 갔다. 그때부턴 용돈을 받았지만, 용돈은 언제나 부족했다. 남을 가르칠만한 주변머리가 못된 탓에 소위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 생각은 꿈도 못꿨고, 언제나 난 궁핍에 허덕였다. 대학 때 처음으로 용돈을 받아서 계획성 있게 돈을 쓰는 연습을 하지 못했던 거다. 나보다 더 사정이 안좋은 친구도 있긴 했지만, 내가 본과 4학년 당시의 용돈은 다른 친구들이 “그거 받아서 어떻게 사냐”고 할 정도였다. 그게 한이 되었었는지 난 졸업 후 월급이-내겐 생전 처음 받아보는 거금이었다-란 걸 받고 나자 정말 열심히 돈을 써댔다. 첫달월급을 1만원 남기고 다 썼을 정도. 어머니의 권유대로 50만원씩 적금을 붓지 않았더라면 조교 4년을 마친 후 수중에 돈 한푼 없었을게다. 훨씬 줄어든 돈을 받았던 군생활 3년을 조교 때 번 돈으로 메꾸어 가며 마친 나는 학교에 발령을 받고난 뒤 갑자기 많아진 월급에 당황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건 초반부의 일이고, 난 이내 그 월급에 적응해 오늘까지 살고 있다. 그러니까 내 헤픈 씀씀이의 원인은 어려서부터 스스로 책임지는 훈련이 덜된 탓이다.
외상을 하면서 떵떵거릴 수 있는 마법의 장치인 신용카드, 그게 없었다면 우리가 그렇게 금방 IMF 위기를 탈출할 수 없었을 거다. 하지만 그 처방은 결국 수많은 신용불량자를 양산시켜 우리 경제에 부담이 되고 있다. 돈이 없어도 마음대로 그을 수 있는 카드를 받은 사람들, 그들은 월급을 처음으로 받아본 나처럼 가슴이 부풀었으리라. 호기있게 쓰다보니 돈이 모자라고, 카드를 또 한 개 만들고. 이런 날이 계속되다보면 2천, 3천 빚지는 건 우스운 일일 것이다.
지금은 미성년자에게 카드가 발급되지 않는다. 물론 타당한 조치라고 생각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어차피 앞으로의 사회는 카드가 주 거래수단이 될 터인데, 그럴 거면 차라리 어릴 적부터 카드를 쓰는 훈련을 시켜줌으로써 나중에 마구잡이로 긋는 사태를 막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무조건 돈을 안쓰는 것도 좋은 건 아니겠지만, 분수에 맞지 않는 과소비는 더 나쁘다. 돈을 제대로 잘쓰는 것, 그건 어릴 적부터의 훈련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