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년 LA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하형주는 전화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무이, 이제 고생 끝났십니더”

하형주가 말하는 걸 봤는지, 그 대회 양궁에서 금메달을 딴 서향순은 엄마와 전화를 할 때 매우 썰렁한 목소리로 이랬다.

“엄마, 고생 다 했네!”

권투선수 홍수환이 세계챔피언이 되고나서 했던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란 말은 최고의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86년 아시안게임에서 육상 3관왕을 차지한 임춘애는 라면만 먹고 운동을 했다며 “우유 먹고 뛰는 선수가 부러웠다”라고 했단다. 나중에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설도 나왔지만, 임춘애의 가냘픈 몸매로 보아 마음껏 우유를 마셨을 것 같진 않다. 80년대만 해도 운동선수들은 이렇듯 헝그리정신으로 무장한 채 경기에 임했고, 그들의 뒤에는 언제나 어머니가 있었다.


지금은 금메달을 딴 선수들에게 전화 인터뷰 같은 걸 하지 않는다. 카메라가 직접 가족들 집에 대기하면서 경기를 보는 광경을 찍는 세상이니 전화 인터뷰가 필요없을 듯 싶기도 하다. 게다가 전화 인터뷰를 한다 해도 “어머니 고생 끝났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국민들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킬 선수도 별로 없어 보인다. 양궁서 우승한 선수들은 다들 피부가 좋고 영양상태도 괜찮아 보이며, 이성진 선수는 ‘오리궁뎅이’란 별명이 어울리게 히프가 컸다 (옛부터 큰 히프는 부의 상징이다. 내 히프를 보라!). 탁구신동 유승민도 돈걱정 없이 운동을 한 듯 보이며-독일 유학도 갔었지 아마-TV에 비춰지는 다른 메달리스트의 집들 역시 가난과는 거리가 먼 듯했다. 농구선수 서장훈의 집도 꽤 부자며, 이상민의 곱상한 얼굴을 보면 고생이라곤 안해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옛날엔 집안이 가난해도 본인만 열심히 공부하면 서울대를 갈 수 있었다. 교련 시간에 교관이 자기는 농부의 자식이라면서 “집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 손들어봐요”라고 했을 때, 내 친구 하나가 매우 부끄러워하며 손을 들었다. 그 친구가 장학금 신청서를 낼 때, 월수입을 12-15만원이라고 적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돈이 너무 없어서 휴학을 해야 했던 친구도 있다. 행상 차림으로 들어가는 아주머니를 수위아저씨가 잡자 “내 딸이 입학한다”고 말하는 광경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통계 수치가 말해주듯, 지금은 웬만큼 월수입이 되는 집이 아니면 서울대에 자식을 집어넣기가 무척 힘들다. 언론은 가물에 콩나듯 나오는 미담 사례를 대문짝만하게 보도하며 “노력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신화를 유포하려 애쓰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돈=성적’이라는 걸. 강북에 위치한, 내 모교인 한성고등학교에서 우리 과에 진학을 못시킨 지도 벌써 십년이 지났다. 그러고보면 내가 살던 시대는 그야말로 학력이 가장 저하되었던, 그래서 실력없는 사람도 운이 좋으면 대학을 잘갈 수 있는 시대였다. 지금 같으면 내가 이 학교를 꿈이라도 꿨을까.


무척이나 진부한 말이지만, 어느 새 돈이 전부인 세상이 되고 말았다.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카피가 히트를 치고, ‘10억 만들기’류의 책이 인기를 끄는 것도 그렇게 보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개천에서 용나는 성공신화는 더 이상 없다. 용은 개천이 아니라 용궁에 있다.


* 피에스: 로또나 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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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8-23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주부터 꼬박꼬박 사려구요. (오랜만에 1등! >ㅂ<)

파란여우 2004-08-23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또도 사시고 서재 순위 30위에도 들어서 꼬리치는 벤지에게 맛난 간식좀 사주세요^^

로렌초의시종 2004-08-23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고 보니 마태우스 님 서재에 처음 발걸음을 한 계기였던 '마녀가 더 섹시하다;란 책 속의 '학벌이 권력이다'란 글이 생각나네요. 결국 이제는 아이들이 자기 집안 레벨에 맞춰서 대학에 가고 그에 따라서 권력을 배분받거나, 아예 못받거나 하면서 살게 되는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한다면 전 저희 집의 레벨에 맞는 대학을 다니는 셈이죠.
그래요, 더이상 전 신화를 믿지 않아요. '맞벌이의 함정'에서 그러더군요, 아무리 노력하고 돈을 더많이 벌어도 현상유지도 어렵다고. 어쩌면 지금 우리들은 그나마 현상유지를 하려고 겨우겨우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그렇게 사는 건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것도 참 무척 어려워요......

마태우스 2004-08-23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님이 변심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믿지 않았었는데, 역시 제게 돌아오셨군요! 이번주 로또에 동반 당선되는 건 어떻습니까.
파란여우님/벤지 먹을 건 제가 그래도 잘 챙깁니다. 음하하하.<--괜한 웃음...

아영엄마 2004-08-23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여전히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시면서... 괜히 엄살은~~
그나저나 요즘은요 돈 있는 집 아이들이 운동하는 경우가 많대요~ 특채로 대학 가기도 좋고(대학들어가서 그만둬 버리는 경우도 있다니..), 부모가 물질적인 지원해 주어야 지도선생님도 신경 더 써주고.. (전에 태권도심사 받으러 갔을 때 엄마들이 이야기 하는 거 들었어요.) 안 그래도 어제 라면만 먹고 뛴 여자마라토너가 누구였더라? 하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님께서 알려주시는군요!
요즘은 뭐든 돈 있어야 되는 세상인 건 맞습니다.. 저도 로또를 사야 할까요?

털짱 2004-08-23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쓰신 페이퍼는 일관된 그 '무엇'이 보입니다. 자, 이제 황홀한 백일몽은 끝났다. 현실로 나오렴. 그런 건가요?

비로그인 2004-08-23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둘리가 털이 마구 자라나네요(웃음)

털짱 2004-08-23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미녀가 날추워졌다고 털 심어주고 갔답니다.^^

마태우스 2004-08-24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털짱님/오늘 꽤 많이 썼더군요. 어제 새벽에 쓴 게 대부분 오늘로 카운트가 됐다는... 일관된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On your mark님/그러게요(저도 웃음)
털짱님/그 미녀가 누군지 가르쳐 주세요!

하얀마녀 2004-08-24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희망이라곤 로또밖에 없다고 늘 주위에 외치고 다니면서 아직까지 로또를 사본 적이 없어요. ㅠㅠ

2004-08-24 0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냐 2004-08-24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심히 넘기는 사회 현상에 대해 님처럼 예민한 후각을 발휘하고, 깊게 분석하시는 분을 못뵜더랩니다. 만세~와와와~ 앗참. 추천.

ceylontea 2004-08-24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또... 남편은 항상 사고. 저도 가끔 사는데.. 과연 그것이 될까요?

2004-08-24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라비스 2004-08-24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벌 2세이시면서도^^; 사회 체제에 비판적 시각을 잃지 않으시는 마태님께 감사!

mannerist 2004-08-24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돈많다고 다 행복해지는 건 아니지만 돈없으면 불행해지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삼십분 후, 또 매너는 수업하러 갑니다. ㅎㅎㅎ

sooninara 2004-08-24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집안 능력과 상관 없이 대학 간 마지막 세대인 이유?
전두환대통령이 과외 금지했잖아요...그래서 비밀 고액과외 하는 일부 말고는 학원도 안다니고..학교에서 야간 자습한다면서 놀다 집에 오고..그래도 대학 갔었죠..
그런데..이미 그시대는 전설 속의 아~옛날이여랍니다..ㅋㅋ
요즘은 유치원생부터 고3까지는 과외,학원은 전공 필수구요..재수는 선택 필수랍니다..

만월의꿈 2004-08-24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마태우스님 재벌 2세였나요?+ㅁ+??
뭐, 항상 올려주시는 글은 꼬박꼬박 챙겨보지는 않지만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아직 자라나는 고1이라구요, 가슴에 새긴다니까요?? 책임감이 생기지 않으세요??(웃음)
이거 제 서재에 퍼갑니다^-^

sweetrain 2004-08-24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긴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학원 한번 안다니고도 재수 안하고 서울소재 4년제 주간 간건 하늘이 도우신 거지요...(외국어영역 막판에 연속으로 14갠가 찍었는데 다 맞아버리는 초초초 대박이 터졌거든요.)

2004-08-24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