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
요즘 <삼국지>를 너무 우려먹는 게 아니냐는 비난의 소리가 높다. 하지만 그런 비난에 굴하지 않고 계속 우려먹으리라. <삼국지>를 읽으면서 웃기는 대목을 발견했다. 제갈공명에게 유비가 삼고초려를 하는 대목.
[동자 하나가 나와서 묻는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유현덕이 대답한다. “한나라 좌장군 의성정후 예주목 황숙 유비가 선생을 뵙고자 찾아왔다고 여쭈어라”
동자가 말한다.
“제가 어찌 그렇게 긴 이름을 다 외우겠습니까?”
“그러면 그냥 유비가 찾아왔노라고 여쭈어라”(4권 15쪽)]
겸손한 걸로 나오는 유비도 공명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는 그래도 폼을 잡고 싶었나보다.
-모교수
내 은사 한분은 명함에다 온갖 직함을 다 써가지고 다니셨다. x과 과장에 무슨학회 이사, 어느 협회 회장, 대충만 세도 열 개가 넘었다. 그걸 받는 사람들이 그 직함들을 다 읽어볼까 의문이 든다. 하긴, 수업 때도 당신 자랑을 무척이나 하시곤 했으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 선생님이 결혼식 주례를 하신 적이 있었다. 사회를 보던 친구가 선생님께 가서 물었다.
“선생님 소개를 해야 하는데, 선생님 직함을 이거, 저거, 그거... 이렇게 소개하면 될까요?”
선생님은 고개를 저으셨다. “요거, 조것, 고것이 빠졌어”
사회자는 결국 “전국 상담협회 이사에 세계 서재학회 간사이자 인터넷서점 알라딘의 파수꾼이자...”로 시작되는 길고 긴 소개를 해야 했다.
-명함
난 명함이 없다. ‘언제 잘릴지 모르니까 안만들었다’는 내 말은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지만, 그보다는 명함 자체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게 진짜 이유일 거다. 난 사람이 됨됨이가 아니라 그가 가진 직위에 의해 평가받는 게 싫다. 더구나 하는 것에 비해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교수’라는 타이틀은 나로 하여금 명함 파는 걸 주저하게 만든다. 뭐 자랑할 일 있나? 직위 말고도 연락처와 주소가 적혀있긴 하지만, 명함은 대개 친하지 않은 사이에서 교환되는 것이고, 김영하의 단편에서도 나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관하고 있는 명함의 주인공들 중 절반 이상을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니 연락처와 주소가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살아오면서 명함이 없어서 불편했던 적은 별로 없다. 다른 사람이 명함을 건네면서 내게도 명함을 요구할 때, 난 “잘릴까봐 아직 안만들었습니다”라는 대답을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하곤 했지만, 실제로 미안했던 적은 없다. 그런 나도 딱 한번 명함을 만들 걸, 하고 후회한 적이 있다. 2002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한나라당 박원홍 의원이 “노사모는 룸펜들(백수라는 뜻)”이라는 망언을 했다. 그 결과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는 분노한 노사모들이 자기 명함을 붙이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졌다. 명함이 없던 난 여의도 근처 인쇄소를 뒤지면서 20분만에 속성으로 명함을 만들어 줄 곳을 수배하고 다녔다. 그런 곳이 없어서 어쩌나 싶었는데, 막상 당사 앞에 가보니 명함 대신 종이에 자신의 직장명과 연락처를 쓴 사람도 의외로 많아 나도 그렇게 했다. 그게 명함이 없어 곤란했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난 마음 속까지 그렇진 못하다. 내가 명함을 굳이 만들 필요가 없는 건 내가 교수인 걸 다른 사람들도 다 알기 때문이고, 모른다 해도 주위 사람이 알아서 말을 해줘서다. 내가 교수란 걸 모르는 사람 앞에서 제발 무슨 일 하는지 물어봐 주길 바랐던 적도 여러 번 있다. 그러면서 난 이렇게 말한다.
“난 사람이 됨됨이가 아니라 그가 가진 직위에 의해 평가받는 게 싫다”
정말 싫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