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실 여기다 쓸 얘기는 아닙니다. 제 주위에 득실득실한 한나라당 지지자 분들께 하는 얘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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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97년 11월부터일거다. 그 전까지는 맨날 프로야구에 연예가 뉴스 얘기만 하면서 희희낙락했지만, 잘 돌아가겠거니 했던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라는 미증유의 사태를 맞으며 파산을 하는 걸 보면서, 정치라는 게 이렇듯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우리가 후진국으로 아는 브라질이나 멕시코에서는 경제를 파탄시킨 정치세력은 선거로 응징이 되는 데 반해, 199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거의 당선권에 근접한 득표를 하는 걸 보면서 우리나라 정치의 왜곡된 구조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그게 계기가 되어 2002년 대선 때 노사모에도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난 노무현을 찍었다. 반대자들은 5년을 어떻게 보낼까 심란해하고, 지지자들 중에는 "노무현 지지를 후회한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다고 5년으로 규정된 대통령의 임기는 줄어들지 않는다. 일은 이미 저질러진 것,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잘한 건 칭찬하고 잘못된 건 비판하면서 이왕 선출된 대통령이 조금이라도 일을 잘 하도록 견인하는 것일게다. 그에게 쏟아지는 비판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릇이 안된다", "품위가 없다"는 말들이 과연 대통령의 직무 수행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지 난 알 수 없다. 전두환, 김영삼, 노태우, 김대중, 최근에 경험한 4명의 대통령 중 노무현만 유독 그릇이 안되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정치적 성향이 달라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노무현을 찍었다는 날 빨갱이 보듯이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어머 너 노사모였어?"라고 놀라는 친구를 보면서, 난 그게 몹시 어렵다는 걸 느낀다. 언제나 말하지만 난 선거 때를 제외하면 정치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날 괴롭히는 것은 청와대나 국회에 있는 분들이 아니라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내게 부여한 일들이고, 주량이 약한 내게 술을 강권하는 모씨며, 술만 마시면 단란한 곳에 가자고 조르는 친구들이다. 정치를 하는 분들은 내가 관심을 갖기에는 너무나 멀리, 높이 있다.
그럼에도 내 사랑하는 친구들은, 그것도 몽땅 한나라당 지지자들인 내 친구들은 나를 보면 정치 얘기를 꺼내 날 곤혹스럽게 얘기한다. 반박을 하면 화낸다고 하고, 가만히 있으면 자길 무시한다고 하는 그들, 그들은 어쩌면 내게 노무현 욕을 함으로써 평소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것일지도 모른다.
노빠와 이빠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다른 사람의 선택에 대한 포용인 것 같다. 천만표를 얻은 이회창도, 그보다 조금 많은 표를 얻은 노무현도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자들이고, 좋아할만한 점들이 있게 마련이다. 지역감정에 대한 노무현의 도전에 감동할 수 있고, 이회창의 화려한 학벌과 감사원장 시절의 대쪽정신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런 걸 다 무시한 채 "어떻게 인간으로서 한나라당을 찍을 수 있냐"거나 "노무현을 좋아하는 게 말이 되니?"라고 묻는 건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나 역시 노무현의 업무 수행에 실망을 많이 한다. 그를 뽑아준 지지자들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도둑질을 하듯이 몰래 이라크에 군대를 보낸 것도 말이 안나오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너 왜 노무현 찍었어?"라고 윽박질러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당시로서는 노무현이 최선의 길이었다는 내 생각이 변하는 것은 아니니까. 욕을 한다고 임기가 단축되는 것도 아니고, 5년 단임을 천명하고 있는 우리 헌법도 대통령을 심판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런 상태에서 내게 별반 동의할 수 없는, 노무현에 대한 비난을 퍼붓는 것은 싸우자는 얘기밖에 안되는 게 아닐까.
정치는 그 속성상 편가르기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합리적 선택이 지역감정을 비롯한 여러 요인에 의해 왜곡되어 온 탓에, 정치적 성향의 차이는 가족간, 친구간에도 극심한 분열을 불러오곤 했다. 설득과 타협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닌지라 술자리의 정치 얘기는 대개 싸움으로 귀결되기 일쑤다. 난 사랑하는 우리 친구들과 그런 소모적인 이야기로 맘 속에 앙금을 쌓아가고 싶지 않다. 우리가 보냈던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나갈 미래 얘기를 하고 싶다. 하지만 나의 이런 바람과는 달리 사랑하는 내 친구들은 언제나 정치 얘기를 꺼내 날 주눅들게 만든다. 친구들은 그렇게 해서 자신의 스트레스를 푸는지 몰라도, 그걸 조용히 감내해야 하는 난 맘 속에 스트레스가 쌓이며, 열역학 2법칙에 의해 내게 축적되는 스트레스의 양은 언제나 친구들이 푼 스트레스의 합보다 많아진다. 좀머 씨는 "제발 날 좀 내버려 둬"라고 외치다 죽었는데, 제발 내게 정치 이야기를 꺼내지 말아주면 안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