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을 꿨다. 친구가 밥을 하는데, 거기다 모르고 잉크를 쏟아 한시간이 넘도록 미안해 죽겠어하는 그런 꿈. 그 다음 꿈은 테니스를 쳐야 하는데 멤버 하나가 어디론가 가버려 사람을 한명 구하느라 여기 저기 전화질을 하는 내용이었다. 피로가 쌓여 전날 열시를 조금 넘겨서 잠이 들었건만, 그런 꿈을 꾸고나니 간만에 푹 자고나서도 여전히 피곤하다. 그러고보니 요즘은 너무 좋아서 웃다가 잠이 깨는 꿈을 꾼 기억이 없다. 꿈을 꾸는 날도 그리 많지 않지만, 기껏 꾼다는 게 시험 때 하나도 모르겠는 그런 꿈이다. 왜 내 꿈에는 이쁜 여자가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깨어 있을 때 늘 미인들만 만나서?
혈기왕성했던 고1 때, 난 안소영을 좋아했다. <애마부인>으로 한창 잘나갈 때인데, 그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만 봐도 난 충분히 넋이 나갔다. 고1의 추석에 전주로 성묘를 갔을 때다. 내가 자는 곳의 맞은편 방을 보니 커다란 달력이 하나 있는데, 그 모델이 안소영이다. 인어가 머리를 빗는 그런 포즈로 앉아 있는 게 어찌나 요염하던지, 난 나도 모르게 그 방에 들어가 9월 달력을 뜯었다. 조그맣게 접고난 뒤 품속에 넣어 하루를 버텼고, 나중에 내방 서랍에 넣어 두었다. 고교생 아들에게도 책상검사를 했던 아버님 덕분에 그 사진은 잔인하게 버려졌지만, 하두 많이 봐서 그런지 그 사진은 지금도 머리속에 남아 있다. 고1 시절 딱 한번 내 꿈에 안소영이 나왔다. 친구에게 꿈 얘기를 이렇게 했다.
"꿈에 안소영이 나온 거야. 옷장 안으로 밀어넣는 데까지 성공했는데 그때 꿈이 깬 거 있지!"
"저런!" 친구는 나보다 더 아쉬워했다. 안소영은 내 꿈에 나왔던 최고의 미녀였다.
프로이드가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꿈은 무의식의 세계를 드러내 준다고 한다. 평소에는 소심하던 사람도 꿈에서는 터프할 수 있고, 그게 자신의 본 모습일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런데 나란 놈은 꿈에서도 현실에서의 내 모습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현실의 내 모습은, 여자를 만났을 때 수줍어서 얼굴도 못보고, 어쩌다 손만 닿아도 깜짝 놀라는 타입이다. 물론 여자 측에서 적극적으로 유혹을 하면 못이기는 척하고 넘어가지만, 하여간 대부분의 경우 난 수줍은 소년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왜 꿈에서도 난 여전히 수줍은 소년인 걸까. 여자가 나오는 꿈을 가물에 콩나듯 꾸지만, 그때도 난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비비 꼬고 있다. 깨고나면 후회한다. 어차피 꿈인데, 확------------------------- 하지만 꿈 속의 나는 그게 꿈인 걸 도통 모르니, 안타까울 뿐이다. 프로이드의 말이 맞다면 내 무의식 어디에도 터프함이 담겨 있지 않은 거다. 다른 사람은 여자랑 한방에 있으면 가슴이 뛰어서 잠도 못잔다는데, 내가 여자랑 잠을 자고도 손끝 하나 안건드릴 수 있는 비결은 의식과 무의식이 혼연일체로 '수줍은 소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인가보다. 꿈에서나마 자유로우면 좋으련만.
* 그렇다고 제가 언제나 손끝 하나 안건드리는 건 아니랍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여자가 적극적으로 유혹한다면....아이 부끄러워.
** 수줍은 미소년이라고 쓰고 싶어 죽겠는데, 겨우 참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