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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환상
대니얼 J. 부어스틴 지음, 정태철 옮김 / 사계절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다니엘 부어스틴을 알게 된 건 강준만의 책을 통해서다. 부어스틴은 '의사사건'-이 책에서는 가짜사건으로 번역된-이란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인데, 의사사건은 이런 거다. 낡고 손님도 별로 없는 호텔이 30주년 이벤트를 벌이면서 자기가 지역사회에 어떤 공헌을 했는가 공청회 같은 걸 해버리면 사람들이 "아, 저 호텔이 그렇게 훌륭한 일을 했구나"라며 칭송을 하게 된다는 것. 그는 언론과 광고의 힘이 비대히진 작금의 현실이 그런 의사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얘기를 354페이지에 걸쳐서 한다. 처음 절반 정도는 꽤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 얘기가 그 얘기인지라 갈수록 지루했다. 한자도 안빼놓고 읽어야 '한권 읽었다'고 카운트를 하는 내 집요함이 아니었다면, 읽다가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부어스틴은 한 시대를 진단하는 석학이다. 60년대에 나온 이 책은 지금 읽어도 전혀 손색이 없고, 책이 나온 이후 40여년간의 변화양상은 그가 얼마나 탁월한 학자인가를 입증해 준다. 엘빈 토플러나 사무엘 헌팅톤처럼 시대를 진단하는 사람을 우리는 석학이라고 한다 (후쿠야마도 그 중 하나일까?). 이런 석학들이 쓴 책을 읽는 사람은 대충 네 부류다. 지식인들, 자신이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앞으로 지식인이 되고픈 사람, 그리고 얼떨결에. 난 물론 마지막 부류에 속한다. 주변 사람이 이 책을 읽고있는 걸 보자마자 주문을 했는데, 책 표지가 근사해서 그랬다는 설과, 이 책을 읽으면 좀 있어 보이니까 그랬다는 설이 나돌고 있다.
부어스틴은 미국 얘기를 주로 했지만, 언론의 힘이 막강하고, 그들이 수많은 의사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나라도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예컨대 파크뷰 의혹 때처럼, 정부와 여당 인사의 비리에 관한 근거없는 기사가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하면, "정말 나쁜 놈들이네"라고 흥분할 게 아니라 "아, 선거가 눈앞에 있구나"라고 생각을 해야 한다. 실제 선거가 야당의 압승으로 끝나자마자, 비리 기사는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총리에 대한 음해성 기사가 연일 실린다고 하면, "그 총리 정말 나쁘네"라고 맞장구를 칠 게 아니라, 총리가 혹시 그 신문사에게 찍힐 일을 한 게 아닌가 의심을 해야 한다. 실제로 총리를 하던 박태준 씨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에게 "요즘 잘 지내?"라고 감히 반말을 한 게 괘씸죄로 찍혀 "박태준, 왜이러나"는 큼지막한 기사로 보복을 당했다. 모 신문이 롯데백화점을 일주일간 욕하면 롯데 측이 그 신문에 주려던 광고를 뺀 게 아닌가 의심을 해봐야 한다. TV에서 닭에 발암물질이 있다고 보도하면, 그 기자가 닭을 먹다가 뼈가 목에 걸린 건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러니까 온갖 정보가 홍수를 이룰 정도로 언론자유가 보장된 이 나라에서도 객관적인 진실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매스컴을 탄 건 무조건 사실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그들은 더더욱 쉽게 여론조작의 대상이 된다. 부어스틴은 그런 환상에 빠지지 않으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맞다. 제발 좀 깨어나자. 신문을 읽을 게 아니라, 행간을 읽자.
참고로 이 책에는 무진장 많은 각주가 나오는데, 너무 친절해서 짜증이 났다. 다음 구절을 보자.
[미국은 아주 훌륭한 자발적 단체175)의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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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단체]
[(인도에 있는) 영화관에서 언어 장벽은 없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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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자막이나 더빙이 있기 때문에]
이딴 각주가 왜 필요한가? 부어스틴은 이 책을 일체의 각주 없이 썼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도 이 책 정도라면 각주 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역자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과잉친절은 모독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