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생들과 술을 마시는데, 예과 1학년 애가 이런다.
"혹시 내일 의학개론 강의 있지 않으세요? 오늘 오신 선생님이 내일은 기생충이니, 재밌겠다고 하시던데"
갑자기 술이 확 깼다. 내가 내일 강의던가? 담당조교 선생의 연락처를 수소문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오늘은 서울서 중요한 약속이 있어 출근을 안하고 개겨보려 했는데, 일단 학교를 와야겠구나... 난 손등에다 큼지막하게 '강의'라는 두글자를 써 넣었다.
아침에 일어나 알라딘에 코멘트를 열심히 달다가, 손등에 있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 강의!'
예전에 보낸 메일을 뒤져보니 강의 시간표가 첨부되어 있다. 클릭했더니 한글 2002라 파일이 깨진다. 담당조교의 전화번호가 있기에 전화를 걸었다. 연락이 안된다. 에잇, 할 수 없다! 연락을 달라는 메시지를 보낸 뒤, 짐을 챙겨들고 기차역으로 가 입석을 끊었다. 문가에 서서 잽싸게 강의준비를 했다. 기차가 수원에 도착할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의예과 조교란다.
나: 제가 오늘 강의던가요?
조교: 아닌데요.
나: 그럼...제 강의는 언제죠?
조교: 학기초에 강의 하셨잖아요.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난 이미 강의를 했었다. 심지어 시험문제까지 전해주지 않았던가. 그걸 어떻게 까먹을 수가 있지? 나같은 사람을 위해 담당조교가 수업 며칠 전에 미리 연락을 취해 주는 게 아니겠는가.
잽싸게 수원에 내렸다. 서울행 기차를 기다리며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먹었다. 빵을 한입 물고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니, 갑자기 삶의 회의가 밀려온다. 다들 바쁘게 사는데, 난 뭐란 말인가.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잘릴 날을 하루하루 기다리며 살아가는 내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맨날 술이나 먹고, 바지는 88도 안맞고... 목이 메어 빵이 잘 안넘어가는 와중에 전화가 왔다. 모교에 있는 심복이다.
"오늘 X선생님이 술 한잔 같이 하잡니다. 꼭 연락하라고 해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