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공부 이외에 스스로 공부를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 처음 맞은 중간고사, 늘 하던대로 수업 때 들은지식을 가지고 시험을 보려고 했다가, 아무래도 불안해서 노트를 보니 하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집구석에 앉아 공부를 시작했다. 눈으로 보면서 외웠다. 다음날 시험을 보고나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공부 안했으면 큰일날 뻔했다" 그 다음부터는 시험 기간 중에는 공부를 했다. 첫시험 성적표를 아버님께 보였더니 "이래서 대학 가겠냐"고 하셨다. 시험 전날이라도 공부를 안했었다면, 아버진 아마도 기절하셨을 것이다.
중2 때 우리 담임은 쓰면서 공부를 하라고 하셨다. "연습장에다 책을 통째로 베껴라. 외워질 때까지 베끼고 베껴라!"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편이었던 나, 그때부터 난 쓰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어찌나 열심히 썼는지 시험 기간이면 볼펜 심 하나가 하루에 닳았고, 연습장은 이틀이면 작살이 났다. 쓰면서 공부하는 습관은 고3 때까지 날 지배했는데, 내 엄지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은 언제나 굳은 살이 박혀 있었다. 대학에 들어와 정신없이 놀다보니 엄지손가락의 굳은살이 점차 없어졌는데, 난 그게 참 서운했었다.
대학에 다닐 때, 어디선가 이런 기사를 읽었다. "쓰면서 공부하면 머리가 나빠진다" 조그만 기사였지만, 내게 미친 충격은 컸다. 갑자기 내가 살아온 나날이 부정되었다. 그렇구나, 내가 그래서 머리가 나빴구나. 내가 세 번 반복해야 남들이 한번 한 만큼의 성적을 올렸던 것도 다 그때문이구나. 그 후부터 난 자를 대고 책에다 줄을 치며 공부를 했다. 줄을 치지 않고 그냥 읽어도 되지만, 공부한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날 지배했다. 그건 점차 발전되어 형형색색의 형광펜으로 줄을 긋기 시작했다. 그렇게 채색된 책을 보고 있노라면, 외워진 건 별로 없어도 마음은 뿌듯했다. 그때의 난 일종의 예술가였던 것 같다.
나중엔 매사가 귀찮아졌다. 애용하던 조그만 자를 난 번번히 잃어버렸고, 형광펜도 자꾸 쓰니까 색도 이상해지고, 빨리 닳았다. 그때부턴 그냥 빨간 플러스펜으로 자도 안대고 줄을 그었다. 어쨌든 공부한 흔적은 남겨야 하니까. 내가 공부한 흔적을 물끄러미 보던 친구의 말이다. "야, 넌 왜 '그러나' '하지만' 같은 조사에다 동그라미를 잔뜩 그려 놨냐?" 그렇다. 난 줄 치는 게 목적이었지, 뭐가 중요한지는 내게 의미가 없었나보다. 어쨌든 그 버릇은 지금도 남아, 공부에 관련된 책이 아니라도 줄을 치며 읽는다. 그래서 좋은 점? 우선 열심히 읽은 것 같아 기분이 좋고, 어디까지 읽었는지 확실히 알게 되어 좋다. 어려운 책 같으면 당췌 읽었는지 안읽었는지 모르겠을 때가 많은데, 빨간 줄이 있으면 그전 내용을 이해했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그 다음부터 읽는다. 언젠가 술을 마시면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내용은 하나도 모르겠는데 삐뚤빼뚤 책에 줄만 북북 그어져 있어 속상했었다. 그 후부터 술먹고 책읽는 짓은 안한다. 어찌보면 그건 음주운전만큼 나쁜 게 아닐까?
줄을 치느라 난 가방에 빨간색 플러스펜을 잔뜩 가지고 다닌다. 내가 가방을 꼭 끌어안고 다니는 걸 의아해한 내 친구가 가방 검사를 했을 때, 플러스펜 빨간색이 열세자룬가 나와서 애들이 놀란 적도 있다 (그밖에 부채랑 맥주병 따개가 있다는 것에도 신기해했다). 뚜껑을 워낙 잘잃어버려 플러스펜을 다 쓰면 뚜껑만 모으는데, 그렇게 모인 뚜껑도 열 개는 되는 듯싶다. 아무튼 내가 다 읽은 책을 보면 정말 개판이다. 책 본문에는 화살표와 동그라미, 밑줄 쫙, 이런 것들이 난무하고, 책 맨 뒷장을 보면 글쓸 소재, 리뷰 쓸 때 참고할 쪽수, 읽으면서 내가 느낀 소감들이 어지럽게 씌여져 있다. 이런 흔적들도 다 나의 소중한 추억이 되는지라, 더더욱 애착이 간다.
옛날에 검은비님으로부터 책을 한권 받은 적이 있다. 소문과 달리 너무도 책을 깨끗하게 보셨던데, 그런 분들을 보면 존경심이 인다. 난 책의 정신이 나눔에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가진 생각을 독자들과 나누는 게 책이니까. 그러니까 읽은 책을 다른 이에게 조건없이 나눠주는 분들은 책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것일게다.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건 내가 책을 소장하는 데서 만족을 느끼는 인간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내 책들이 남들에게 읽히기엔 너무 더러워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