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날 잠을 별로 못잤는지라 포항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죽은 듯이 자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게 잘 안됐다. 전화 때문이다.
난 평소 전화가 많이 오는 편은 아니다. 거대한 조직-술마시는 조직-을 거느리고 있는지라 전화가 많이 올 거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실상은 별로 그렇진 않다. 그럼에도 내게 전화가 많이 온다고 잘못 알려진 까닭은 전화를 받으면 안되는 결정적인 순간에 전화가 와버린 적이 몇번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난 혹시 내가 놓친 전화가 없는지 수시로 휴대폰을 확인하고, 실수로 건 전화를 끝까지 추적해 "전화 왜했냐"고 묻는 부류에 속한다.
잠 좀 자려고 한 어제, 내게 걸려온 대여섯 번의 전화는 내 잠을 토막냈다. 그렇긴 하지만 난 전화 덕분에 여러 개의 일처리를 했다. 친구의 친구에게 진료상담을 했고-내가 했다는 게 아니라 어느 병원의 누가 유명하다고 조언해 줌-아는 성형외과 의사를 소개해 달라는 방송작가에게 친구 전화번호를 가르쳐 줬다. 환자 하나가 기생충이 의심된다고 내게 상담을 의뢰한 후배의 전화까지 포함하면 제법 일을 많이 한 것 같고, 그러고나니 내가 마치 뭐라도 된 것같은 생각이 든다. 왜, TV 같은 데를 보면 재벌들은 대개 전화로 많은 일들을 처리하지 않는가. 수백, 수천의 삶에 영향을 미칠 개발계획을 승락하거나, 수억, 수십억짜리 계약을 체결하는 일 등등. 잘나가는 투자회사 사장인 내 초등 동창도 골프장에서 내내 전화통만 붙들고 회사일을 봤다니, 전화를 통해 일어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을 것 같다. 삶의 여유는 있었을지언정, 봉화나 파발마로 급한 업무를 처리했던 옛날 옛적이 지금보다 비효율적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어젠 예외였지만, 내가 하는 전화는 다른 사람이 본다면 스잘데기 없는 내용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제 술이나 마시자"는 약속을 잡거나, 어젠 뭘했고, 점심엔 뭘 먹었고 앞으로는 뭘 할거라는 신변잡기가 대부분이니 말이다. "초등학생에게 휴대폰이 왜 필요하느냐"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만, 나 역시 그들과 별반 다름없는 통화를 하고 있는 거다. 사실 사업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꼭 필요한 전화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꼭 수십억의 돈이 오가는 일만이 중요한 건 아니다. 내가 관심있는 누군가가 점심을 어떻게 먹었는지 아는 것도, 자잘한 일상을 함께 나누는 것도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게 아닐까. 전화비가 아깝다지만, 만나서 노는 것보다야 훨씬 싸게 먹히는 게 바로 전화, 그래서 난 오늘도 통화 버튼을 누른다. "전화기가 꺼져 있사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