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년에 한번쯤은 어머님이 식혜를 해주신다. 우리집 식혜는 참 맛있다. 쌀을 아주 많이 넣고 국물도 진해, 매제의 말에 의하면 "먹고나면 밥 한그릇을 먹은 것처럼 든든"하다. 그러니 내가 밖에 나가서 캔에 든 식혜를 거들떠도 안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어머님이 갑자기 "이제부터 식혜를 안하시겠다"고 선언하셨다. 힘이 들어서 그런다면 이해가 가겠지만, 그게 아니다. "<생로병사>를 봤더니 설탕이 해롭다더라", 이게 이유다. 그러니 내가 그 프로를 어찌 좋아할 수가 있겠는가? 전전주에는 국이 너무 싱거워서 소금을 달라고 했더니, "<생로병사>에서 그러는데, 소금이 그렇게 해롭데!"란다. 그 프로가 화요일날 밤에 방영되니, 수요일 아침마다 그런 일이 생긴다. 어제도 그랬다.
"민아, 이제부터 돼지고기 절대 먹지 마라"
나, "왜요?"
"<생로병사>에서 그러는데..."
아, 그 지겨운 생로병사. 어머님이 도시락에 싸주시는 돼지고기 양념에 맛이 잔뜩 들어 있었는데, 이제부터 돼지고기 먹는 건 기대를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어머님은 한번 한다면 하시는 분이라, 광우병 파동이 날 때마다 한달 이상 식탁에 풀만 올라오곤 했는데...
뭐든지 많이 먹으면 해롭기 마련이다. 그리고 모든 음식은 해로운 측면과 이로운 면을 다 갖고 있다. 몸에 좋다고 하는 채소에는 다이옥신이 많고, 콜레스테롤이 아주 많다고 알려진 마른 오징어가 맥주에는 가장 좋은 안주이듯이 말이다. 그런데 왜 TV에서는 걸핏하면 "뭐가 해롭다"고 한 부분만 부각시킴으로써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입시키는 걸까? 그래도 의대를 나왔으니 건강에 대해 어느 정도의 철학이 있는-있기는 뭐가 있어? 술만 마시면서...-나로서는 신문.방송에 휘둘리는 어머님이 영 못마땅하다. 지금까지 방송에서 먹지 말라고 한 음식을 다 나열하면, 인간이 먹을 게 과연 있기나 할까?
연구결과의 해석은 굉장히 자의적이다. 예컨대 쥐에게 밥을 많이 먹인다고 해보자. 배가 터질 때까지 밥을 먹이면 그놈은 결국 죽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흔히 먹는 밥이 크게 해로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라고 한다면 말이 되는가? 포도주가 좋다는 연구결과가 대부분 프랑스에서 나오듯이, 음식에 관한 연구결과들은 그 진위와 배경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방송도 문제지만, 어머님은 너무 귀가 얇으시다. 우리 네 형제는 그간 어머님의 실험실이었다. "뭐가 좋다더라"는 말만 들으면 어머님은 그걸 반드시 우리에게 먹였다. 몸에 좋다고 쥐똥을 잔뜩 사오신 적도 있을 정도고, 상어간에서 짰다는 스쿠알렌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가 과일과 콩을 절대 안먹는 것도, 청량음료를 무지하게 좋아하는 것도 다 어릴 적의 쓰라린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내가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갖추게 된 지금도 어머님은 먹는 것을 가지고 나를 통제하려 하신다. 말려봤자 밖에 나가서 나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나를 위해서 그러시는 거겠지만, 이제 건강 관련 TV는 그만 보셨으면 좋겠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어머님의 말씀이 있은 그날 저녁에 밖에서 삼겹살을 먹은 것처럼, 어머님이 뭔가를 먹지 말라고 하시면 반발심에서 더 먹고 싶어지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