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표권이 생긴 뒤 내 첫 투표는, 으로 글을 시작하려 했지만, 그랬다간 내 나이가 들통날 것 같고, 그랬다간 나랑 안놀겠다는 분들이 속출할 것 같아, 그냥 덮는다. 참고로 내 나이는 아주 많다. "저, 정말?" 하고 놀랄만큼. 하여간 투표권이 생긴 뒤부터 난 한번도 투표를 안한 적이 없다. 꼭 국가적 대사가 아니더라도, '투표는 권리이자 의무'라는 사실을 초등학교 때 배운 이래부터, 난 언제나 신성한 마음으로 투표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난스러운 투표지가 발견될 때마다 사람들은 꼭 날 의심하곤 했다. 의심하거나 말거나.
내가 했던 투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92년 대선이었다. 투표 전날, 난 너무 몸이 아팠다. 조교 때라 들어가 쉬지도 못하고, 퇴근 후엔 교수님과 술자리에까지 참석을 했다. 그때는 술을 마시면 아픈 게 나을 거라는 이상한 믿음이 있던 시절이라, 이기지도 못할 술을 마구 들이켰다. 다음날 깨보니 온몸이 열로 들떴고, 눈도 떠지지 않았다. "투표해야 하는데.."라고 뇌까리며 계속 잠만 잤다. 그러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반, 더 이상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떨치고 일어났다. 걷는 것도 힘들어 택시를 타고 얼마 안되는 거리의 투표장까지 갔던 기억, 돌아오는데 너무 추워서 부들부들 떨던 기억도 생생히 남아있다. 내 예측대로, 내가 뽑은 후보는 당선되지 않았지만, 한표를 행사했기에 별 후회는 없다.
나랑 같이 놀고있는 조교에게 투표를 할거냐고 물었다.
"아뇨. 투표하려면 당진까지 가야 하는데, 귀찮아서 안갈래요. 전 정치에 관심도 없고, 지금까지 한번도 투표해본 적이 없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그녀가 한마디 덧붙였다.
"혹시 아버지가 가자고 하면, 그냥 아버지가 찍으라는 사람 찍죠 뭐"
투표를 신성한 권리행사로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런 사람에게도 똑같이 한표가 주어지는 게 못내 안타깝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주위에도 많다. 투표를 마치신 할머니가 누나에게 투표하라고 닦달을 했다. 누나의 대답이다. "싫어! 귀찮아!"
우리 정치를 후진적으로 만드는 사람은 한나라당에 표를 던진 여동생이 아니라, 투표를 안하겠다는 누나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지만 오늘 같이 테니스를 친 내 친구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다. "여러 생각을 하기가 귀찮아" 늘 1번만 찍었다는 친구의 부인은 탄핵 이후 거듭된 친구의 설득에 힘입어 이번 총선에서 투표를 안하기로 했단다. "한나라당 찍느니 기권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게 친구의 말이다.
라디오를 들으니 지요하라는 분이 <한번도 지지않은 사람>이라는 소설을 썼다고 한다. 본인이 직접 만난 사람의 얘기를 소설로 쓴 거라는데, 소설의 결말은 "한번도 사표가 된 적이 없다"고 자랑하던 그 노인이 어떤 계기를 통해 자신이 했던 투표들은 헛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얘기란다. 투표는 자신의 의사표현이고, 찍은 후보가 당선이 안되더라도 그만큼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 "민노당 후보를 찍으면 사표가 된다"는 유시민의 말은, 상황이 급해진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전적으로 잘못된 협박이다. 좌우지간 오늘은 투표일, 아직 투표를 하지 않은 난 어머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어머니와 같이 가서 신성한 내 권리를 행사해야지. 나이를 제법 먹은-사람으로 따지면 80살을 훨씬 넘은 것 같은-우리 벤지에게 투표권이 없는 게 아쉽다. "귀찮아서" 기권하는 사람들 대신 벤지에게 투표권을 주면 좋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