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는 원칙적으로 비정규직이다. 업적을 바탕으로 3년마다 재임용을 받아야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를 비정규직으로 간주하지 않는 건 재임용에서 탈락하는 교수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그런 경우가 있긴 했지만, 서울대 김민수 교수가 그런 것처럼 재단에 밉보인 게 원인이었지 업적이 모자라서는 아니었다. 시대가 바뀌어 진짜로 잘리는 교수가 속속 생기지만, 그게 뉴스거리가 된다는 것 자체가 아직까지 대학은 경쟁의 무풍지대임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 대표적인 수혜자가 바로 나다. 대학에 발령을 받고 근 7년간을 연구와 담을 쌓고 살아왔지만, 잘리는 건 고사하고 승진까지 제때제때 했으니 말이다.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스스로 ‘빙하기’라 일컫는, 논문이 없어 잘릴까봐 불안에 떨던 그 시절, 난 점수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신문에 쓴 칼럼들을 ‘봉사업적’에 써 넣었다. 중앙일간지의 경우엔 1편당 3점이었는데, 열편 정도를 기입했으니 순식간에 30점이 쌓인 거였다. 그 점수를 보고 혼자 뿌듯해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승진과 재임용은 순전히 논문 점수로만 따지는 것일뿐, 봉사업적은 그냥 폼이었다. 좋았던 시대 탓에 난 잘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고, 엄혹한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은 일년에 열편의 논문을 쓴다는 목표가 버겁지 않을만큼 열심히 연구를 하는 사람이 됐다. 2년 남은 정교수 승진에 필요한 점수는 이미 다 채워놨지만, 요즘은 점수 때문이 아니라 재미있어서 연구를 하고 있다.


그녀의 승진 소식을 들었다. S대 교수인 그녀는 국가에서 받은 연구비를 연구하는 데 쓰지 않았고, 연구결과를 조작해 보고서를 냈다. 그리고 그게 들통나자 조교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씌워 내쫓았다. 그걸 내가 매스컴에 제보해 9시 뉴스에 나간 게 벌써 작년 일이다. 그 여파로 그녀는 예정된 승진을 하지 못했고, 6개월 후에도 승진에서 누락됐다. 지난 일년이 그녀로서는 인생 최대의 시련기였을 텐데, 올 4월 1일자로 승진을 한 것이다.


내부 고발자인 나 역시 그리 편한 세월을 보내진 못했다. 학회와 S대에서 주관하는 모든 모임에 난 참석하지 못한 채 은둔생활을 했고, 그쪽으로 발도 못디디는 대신 그 두군데서 죽어라고 욕을 먹어야 했다. 정의라고 믿고 한 내 행동은 “자기가 S대에 못들어오니까 음모를 꾸민 것” 혹은 “교수간의 파벌 싸움에 이용당했다” 등으로 변질된 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내 선배 하나는 술을 먹고 이렇게 호통을 쳤다. “네가 한 행동이 남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알아? 바보같은 놈!” 그런 걸 보면 삶이란 확실히 복잡다단한 것이고,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정치적인 해석이 개입된다. 하긴, 연구보고서를 조작한 그녀가 남의 연구보고서를 심사하는 위원이 되는 것도 아이러니하긴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 일을 후회하는 건 아니다. 그 일을 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난 화병이 났거나, 그게 아니면 지금도 스스로를 저주하며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1년이 미뤄진 승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그녀는 내일 우리 동문들 몇을 불러 축하연을 갖는다 (물론 난 초청을 받지 못했다). 자리가 자리인만큼 내 욕을 얼마나 할지 궁금해 우리 조교 선생을 종업원으로 위장시킬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봤는데, 어찌되었건 지금 S대는 그녀의 승진 문제가 해결되어 한시름 놓았다는 분위기란다. 하지만 과연 그럴지는 의문이다. 몇 안되는 기생충학 교수 자리 중 하나를 그녀가 계속 유지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학교는 물론이고 학회에 도움이 안될 것 같아서다. 글 서두에서 내가 능력이 없다는 걸 장황하게 썼지만, 능력이 없다는 면에서 그녀는 나보다 훨씬 더 아래 있다. 그럼에도 그녀가 논문점수를 차고도 넘치게 채우는 건 나처럼 뒤늦게 각성을 해서가 아니라 바로 위 교수의 약점을 잡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그 교수 방으로 쳐들어가 “재임용 받아야 되는데 논문이 없다. 좀 만들어 봐라”라고 호통을 치겠는가? 약점을 잡힌 교수는 정말 헌신적으로 그녀 이름을 논문 제1 저자로 넣어 주고 있는데, 그러고보면 사람이 사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인 것 같다. 검사들이 그쪽을 뒤진다면 뭐가 나와도 한참 나올 텐데, 애꿎은 한명숙 전 총리만 뒤지고 있으니 그녀의 앞날은 탄탄대로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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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2 22: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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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3 09: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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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0-04-12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갑하네요. 이게 보통의 세상 돌아가는 방식이겠지요.

마태님은 잘하신거라고 생각해요. 기생충학계나 후학이나 모교를 위해서나 다 떠나서,
본인에게 떳떳하고, 가족에게 떳떳하잖아요. 이런 제 생각이 너무 좁고 개인주의적인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2010-04-13 09: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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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0-04-12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은 간혹 불공편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은데, 이런 경우도 그렇네요.
절대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승승장구할 것 같고, 그 잘못된 행동을 공개적으로 말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은..참. 저도 마태님이 잘하신거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용감하게 들고 일어날 때 조금씩 세상은 변한다고 생각하니까요.

2010-04-13 09: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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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2 23: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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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3 09: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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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04-13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분, '승진' 한것 아니라고 생각해요 ^^

2010-04-13 09: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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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4-13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사람의 도덕성과 정치성향은 곧 그 사람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마태우스님이 참 좋아요.

마태우스 2010-04-13 09:38   좋아요 0 | URL
아이, 부끄럽습니다. 제가 또 주드님의 열혈 팬이지 않습니까?^^

다락방 2010-04-13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그러게나 말이죠. 왜 없는건 만들어서라도 뒤지려고 하고, 있는건 애써 못본척 하려는걸까요? 힘빠져요.

마태우스 2010-04-13 09:37   좋아요 0 | URL
오늘 신문 보니까 피디수첩 때 활약한 검사들이 대부분 승진을 했다더군요. 그게 이유겠지요. 인사권이 정권에 있다는 거.....

카스피 2010-04-13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런일을 볼때마다 순혈주의가 결국 이런 부패를 낳는다고 생각합니다.같은 학교 선후배끼리 내 새끼니까 내가 챙겨야지 하는 생각이 이런일을 부추기지요.
S대 교수인 그녀는 국가에서 받은 연구비를 연구하는 데 쓰지 않았고, 연구결과를 조작해 보고서를 냈다. 그리고 그게 들통나자 조교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씌워 내쫓았다. 그걸 내가 매스컴에 제보해 9시 뉴스에 나간 게 벌써 작년 일이다. 그 여파로 그녀는 예정된 승진을 하지 못했고, 6개월 후에도 승진에서 누락됐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요.아마 일반 회사 같았으면 바로 파면되고 아마 형사 고발 되었을 겁니다.왜 대학에서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냥 승진 누락만 시켰을까요.대학 자체,교수 자체가 그런일이 이미 만연되있고 자신들도 그런짓을 했기에 그냥 재수가 없었네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이건 서울시 초등학교 교장 비리와 같은 맥락입니다.서울 교대 출신들만 거의 서울시 초등학교에 배정되니 모두가 선후배라 이런 비리에 스스로 눈을 감고 있기에 교장의 거액 뇌물 수수 비리가 이제야 빵 터지는 거지요.
따라서 대학이든 일반 초등학교든 타 대학혹은 지역출신을 50%이상 섞어놔야 아마 그런 비리가 많이 줄어들 겁니다.
그리고 마테님의 그런 용기에 무척 감복했읍니다^^

2010-04-13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3 09: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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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3 09: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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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3 10: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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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4-13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인과응보 사필귀정이란 말을 믿습니다. 나중에 크게 당하겠죠.
그나저나....아이들과 청년들을 가르키는 교육에 관계된 분들이 저 모양이니 뭘 배울까요.

마태우스 2010-04-19 21:34   좋아요 0 | URL
글게 말입니다. 전 사필귀정을 믿진 않지만, 메피님이 계셔서 그나마 나라가 이정도라도 된다는 건 믿습니다.

L.SHIN 2010-04-15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히 마태님이 백번 잘 하신 겁니다.

마태우스 2010-04-19 21:35   좋아요 0 | URL
이잉, 잘못한 거 없어도 숨어다녀야 하는 이 더리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