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4월 26일(목)

마신 양: 소주-> 폭탄주


학회 땀시 지방에 갔고, 내려간 김에 친구 둘을 만나 술을 마셨다. 하나는 대학 때 맥주 350cc를 먹고 세차례나 오버이트를 해 사람들을 경악시킨 친구고, 모 대학 외과에 근무하는 또 다른 친구는 1학년 때부터 달력에 표시를 해가며 술을 마신 주당이었다. 사람들과 눈만 마주치면 “술 마시러 가자!”는 말을 했던 그 친구는 20년을 그렇게 외길만을 달려온 존경스런 존재다. 그로부터 10년 뒤, 학생 때 몸을 사리던 난 그 친구의 뒤를 이어 달력에 표시를 해가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올해까지 십년간 한결같은 모습으로 술을 마셨다. 나이가 마흔줄에 접어든 지금, 그 친구는 안타깝게도 맛이 가버렸고, 여전히 팔팔하게 술을 마시는 날 부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그의 말이다.

“넌 아직도 십년은 더 마실 수 있겠구나. 내가 작년부터 맛이 갔거든.”


학생 때부터 그 친구는 매사에 여유로웠다. 시험 때건 아니건 기회만 닿으면 “술이나 마시자!”를 외쳤고, 언제나 세상 모든 진리를 다 깨우친 것처럼 굴었다. 지금사 생각하면 그런 게 다 허세였지만, 그때는 그의 그런 태도가 가끔은 재수 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허물없는 친구가 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여유 만만한 표정을 트레이드마크로 하고 있는데, 엊그제 술자리에서 그가 고백한 내용은 우리에게 충격이었다. 그곳에 내려간 지 7년쯤 되었는데 그가 아직 그 병원의 정식 스탭이 아니라는 게 그 하나였다.

“설마! 난 상상도 못했는데.”

더 충격적이었던 건 그가 교수가 못된 이유가 논문점수가 모자라서란 것. 박사학위가 없다는 사실도 놀랄 일이었다. 수료한 지 몇 년 안에 논문을 써야하는 규정이 있는데, 올해가 그 마지막인가 그렇단다. 연구 면에서 별반 볼 게 없는 나한테 “같이 연구할 거 뭐 없냐?”고 묻는 그,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그래서 난 더 마음이 아팠다.


그 친구라면 졸업하고 수련을 받으면 바로 교수가 되고, 그 뒤 쭉 대가 행세를 하며 평탄하게 살아갈 줄 알았다. 물론 다른 힘든 사람에 비하자면 지금이 아주 어렵다든지 그런 건 아니지만, 매사 여유만만해 보이던 그에게 이런 고민이 있을지 상상도 못했었다. 잘 사는 것처럼 보여도 누구나 다 그늘이 있다고 늘 말해왔지만, 막상 그 사실을 확인하는 건 여전히 당혹스럽다.


주위를 보면 다들 어렵다. 사업이 망해서 당구장을 하는 내 친구도, 사랑 때문에 고민하는 또다른 친구도, 여러 가지 일로 서러운 우리 할머니도. 세상에서 정말 잘 사는 사람이 드물다는 걸 안다면, 그분들에게 조금의 위안은 될 수 있으리라. 나 혼자만 잘 사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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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04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펜선생이 떠오르는 술일기에요...쩝..

moonnight 2007-05-04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 친구분 고민 많이 되시겠어요. 내색은 안 하셔도 ;; 저도, 가끔은 나 혼자 너무 별탈없이 사는 거 아닌가 미안할 때가 있더라구요.

물만두 2007-05-04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분 힘내셨으면 좋겠네요.

홍수맘 2007-05-04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저를 위한 글인 것 같아요. 어쩜 전 지금 투정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님의 글 마음에 담아두렵니다.

무스탕 2007-05-05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친구분은 그래도 털어놓을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좋으시겠어요..
마태님은 스폰지 같은 분이신가봐요...

모1 2007-05-05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행복한 세상이 됬으면 좋겠어요. 불가능하겠죠??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서는 누군가 참고 희생해야할테니...

미즈행복 2007-05-05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우연히 톨스토이의 동화를 읽었습니다. 주인공인 소년은 세가지 질문이 있었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인가? 제일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존재는 누구인가? 소년은 답을 친구에게 물어보았으나 만족치 못하고 오래 산 거북에게 물으러 갑니다. 거북을 도와주다가 상처입은 판다를 구해주고 그의 아기 판다가 아직 산에 있음을 알고 구해와서 다시 간호해줍니다. 아직도 질문에 대한 답을 못찾았다고 우울해있는 소년에게 거북이 말합니다. 네가 날 도와주던 순간에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그리고 판다를 구할 때는 그것이 제일 중요한 순간이고, 일이고, 존재였다고, 즉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중요하고 지금 네 옆에 있는 존재가 제일 귀하고 지금 하는 일이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그래요.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며 힘내고 살았으면 합니다.

2007-05-05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5-05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보내주신 정성에 탄복하고 있습니다. 이것, 이렇게 받아도 될는지..(이미 받아놓고 이런 말 하고 있음) 친절한 인사까지..감동했어요. 언젠가 또 뵐 수 있겠지요? 저기..마태우스 님께서 만약 저희 집에 숙박을 해주신다면 님이 지내실 서재에는 서재질을 할 수 있도록 컴퓨터도 있고, 화장실도 딱 한 발자국이랍니다. 주저하지 말아 주셔요.

2007-05-09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6-01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7-07-02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기로운님/오 제 문패를 캡쳐하셨군요 뚜벅뚜벅 걷는 말은 언제봐도 박력있단 말야...
향기로운님/저도 남동생이 좋아요 누님!!
주드님/피씨방을 제공해 주시겠다는 님의 말씀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미모와 더불어 따스한 마음씨까지 갖춘 님께 감사드립니다
메피님/아 그게요....하하하.
미즈행복님/지금 제게는 미즈행복님이 가장 소중한 존재랍니다^^
모1님/아 오랜만입니다. 님 보면 늘 여쭙고 싶어요 동생분은 좀 어떠신가요...
무스탕님/물살이라서 만지면 숙숙 들어간다는...
홍수맘님/힘 내시구요!!!
물만두님/만두성님! 이렇게 한번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달밤님/님은 요즘 어케 지내고 계신지요...
작게작게님/글고보니 요즘 님 글이 통 안보이던데 어디 가셨나요?
테츠님/쇼펜이 누군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어요 쇼펭이나 숀팬은 아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