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기억 보르헤스 전집 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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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은근히 전작주의를 좋아한다. 예컨대 2000년 10월을 공지영의 달로 정해 그가 낸 책 전부를 읽는 식으로. 그렇게 하는 게 그 작가에 대해 단기간에 알 수 있는 첩경이라 생각해서이지만, 세칭 “있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르헤스의 명성에 이끌려 민음사에서 나온 다섯권짜리 보르헤스 전집을 산 건 물경 7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1권을 읽고 나서 2권을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고, 2권과 3권의 간격은 그보다 훨씬 길었다. 계속 그런 식이었다. 다섯 번째 책인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다 읽은 지금, 아무리 생각해도 4권을 언제 읽었는지 기억이 전혀 안나는 걸로 보아 4년은 족히 지났나보다. 평소와는 달리 보르헤스의 책은 뒤의 해설을 읽기까지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의 책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우초’라는 단어에 친숙해졌고, 옮긴이인 황병하 덕분에 보르헤스가 ‘환상적 사실주의’를 추구한다는 걸 알았으며, 다른 데 가서 “보르헤스 책은 다 읽었다”고 자랑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해도 못하는 책을 무조건 읽는다고 다냐 하는 회의가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20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미발표된 원고가 있다면 모를까 앞으로 보르헤스의 책은 나오지 않을 거다. 공지영은 2000년 이후 몇 권의 책을 더 썼으니 전작주의는 아직 미완성이지만, 유명 작가인 보르헤스의 전작주의는 실현한 셈이다. 책을 읽는 이유는 개인마다 다르겠고, 1월달에 내가 알게 된 어느 재수남은 “리뷰를 쓰기 위해 책을 읽어서는 안된다”고 날선 충고를 하기도 했지만, 난 어떤 이유로 책을 읽든 그건 그 사람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보르헤스 전집을 다 읽은 지금 내가 느끼는 뿌듯함, 그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을 투자해 책을 읽은 보람은 있는 게 아닐까.


이건 내가 너무 없어 보일까봐 하는 변명인데, 사실 내가 이 <셰익스피어의 기억>에 나오는 단편들을 전혀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거울과 가면> 그리고 <운드르>는 “진리를 알면 다친다”는 주제일테고, <은혜의 밤>은 누군가를 암살할 때는 최소한 두달은 은둔해야 한다는 얘기 아닌가. 영화가 관객의 마음속에서 완성되듯이, 그냥 난 책 역시 저자의 의도가 어떻든 독자가 받아들이기 나름이라고 생각하련다. 안녕, 보르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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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행복 2007-05-02 0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보르헤스의 명성을 듣고 그 전집을 샀으나 읽다가 포기하고 고이 모셔놓은지 어언 몇년이랍니다. 저는 그 남미 작가들의 "환상적 사실주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고, 공감하지도 않고, 즐기지도 않습니다. 파란여우님이 '백년동안의 고독'을 소설 한 권을 뽑으라면 뽑겠다는 리뷰를 쓰신 것을 읽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는 영~
다 제 미천함때문이겠으나 제 취향이 안땡기는걸 어쩌겠습니까?
어쨌건 완독하심 축하드립니다. 그게 대단하지요.
서경식씨의 '소년의 눈물'을 보니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읽으려다 결국은 포기했다는 얘기가 나오더군요. 마태님은 어쨌건 그 어려운 보르헤스를 포기않고 읽으신 것만으로도 너무 대단하십니다

마노아 2007-05-02 0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보르헤스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신 마태우스님이 대단해 보여요. 그리고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진/우맘 2007-05-02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 감사! 마태님 덕분에 명성에 끌려 이해못할 책과 싸우는 경험을 하나 덜었습니다. ^0^
저도 요즘 순전히 명성에 끌려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을 읽고 있는데요(고양이 요람), 이건 다행스럽게도 재밌네요. 아, 그리고 얼마전 서점에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실물을 목도했어요. 허걱.....그 사이즈와 두께를 보고나서야, 왜 마태님이 그 책을 읽고 그렇게 뿌듯해 했는지 알겠더군요. ㅠㅠ 독서내공의 길은 멀고도 험난합니다. 흑흑.
아, 맞다, 그래도 자랑할 거 하나. 어젯밤, 선물해주신 앤서니 기든스의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을 다 읽어냈답니다!!!!!!! ^________^

비로그인 2007-05-02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가 받아들이기 나름.....에 저도 동감입니다.

전호인 2007-05-02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들 하십니다. ^*^

기인 2007-05-02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문학도의 입장에서는.. 읽고 즐기시면 되죠 :) 독자가 받아들이는 만큼이 바로 마태우스님의 보르헤스인 것 같습니다. 절대적인 보르헤스가 어디있겠어요~ ^^ 보르헤스는 그 상상력의 대단함과 유머 때문에 되게 좋아했었는데.. 마태우스님도 상상력과 유머로 일가견이 있으시잖아요 ^^

승주나무 2007-05-02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라톤으로 따지면 '완주'에 성공한 셈이네요. 나는 마라톤 한 번도 안 해봤는데..부끄럽네용^^; 축하합니다

비로그인 2007-05-02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르헤스는 개개의 문장보다는 풀어내는 이야기 속의 은유와 사물의 내재된 질서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가입니다.
저는 이분의 작품을 읽고 일종의 "개명(開明)"수준의 충격을 받았답니다.
소설을 읽는 새로운 안목이 생긴 셈이지요.
통상의 소설책과는 워낙 다른 언어와 구성에 저역시 편치않게 읽었습니다.
전질을 읽어내신 마태우스님의 의지.., 대단합니다.
경의를 보냅니다. 추천!!


심술 2007-05-03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즈행복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재미없게 읽으신 분을 만나서 맘이 놓이네요. 전 저만 그런 줄 알았습니다.

마태우스 2007-05-05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술님/전 무서워서 못읽고 있답니다..
Hansa님/와앗 개명 수준의 충격이라... 확실히 내공있는 분은 다르시군요! 저도 한 두번 더 읽으면 깨달음을 얻겠지요??? 격려 감사드려요
승주나무님/전 마라톤 하프코스까지 해봤습니다 그거 그만두고 살찌더이다 하여간 감사!
기인님/제 상상력과 유머는 하급이어요 부끄럽게 왜그러신담^^
전호인님/제, 제가요???
승연님/동감해주셔서 감사. 그래서 우리가 코드가 맞는다는...
진우맘님/하룻밤에 책을 읽어내시다니 대단하심. 그리고... 곰브리치 그거 정말 대단한 책이지요. 내용도 어찌나 알찬지, 한달의 절반을 고스란히 바쳤지요
미즈행복님/호오 저 얼마전에 서경식님 책 미녀한테 선물받았는데....^^ 우린 그러니까 코드가 맞는 게로군요!

안태호 2007-11-14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집이긴 하지만...보르헤스의 작품은 더 있는 걸루다가 알고 있다는...ㅎ
전집을 3년전에 샀지만, 부분부분만 읽어본 사람으로서...
당장 제가 읽었던 것만 해도, <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개의 사건>인가 하는 책은
까사레스하고 보르헤스가 같이 쓴 거거든요.
아마도 보르헤스가 쓴 작품들은 더 많을 겁니다.
저는 열심히 읽고 더 찾아 읽어볼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