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인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은 영화”라며 강력히 추천한 덕분에 늦은 밤 연구실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를 봤다. 아무도 없는 일요일 밤 방의 불을 꺼놓은 채 디브이디를 보는 맛은 아주 삼삼했는데, 더 좋았던 건 지인의 말이 틀린 게 없었다는 점. 웬만하면 다 극장에서 영화를 봐버리는 내가 <해바라기>를 안본 이유는 다 선입견 때문이었다. 반성한다. 네이버 평점이 9점을 넘는 영화였는데.


술마시지 말기, 울지 않기, 싸우지 않기... <해바라기>는 주인공으로 나온 김래원이 자신과 했던 약속을 하나씩 깨뜨려가는 스토리를 그리고 있다. 폭력계에 몸담었던 그가 그 약속을 지키며 사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니었는데, 난 그가 언제까지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시종 긴장하며 영화를 봤다. 김래원의 연기는 훌륭했고, 그의 우수어린 표정은 시중에 나온 수많은 조폭 영화와의 차별성을 부여했다. 제목과는 달리 영화 속에서는 해바라기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양어머니 김해숙이 하는 식당에 온 손님이 단 한명도 없었다는 점 등이 인상적이었다. 극중 김래원의 동생인 희주로 나오는 허이재가 누구인지 보려고 프로필을 뒤졌더니 키 165에 45킬로라고 되어 있다. 귀여운 연기를 잘 했다는 건 높이 평가하고 싶지만, 사람이 그러면 안된다. 체중을 말할 때는 현재 체중을 말해야지, 왜 자신이 바라는 체중을 적는가.


하여간 희주는 적분을 못해서 고생을 한다. 희주가 학원 선생에게 묻는다.

“적분은 왜 배워요?”

선생의 대답, “희주가 살 세상에선 적분을 모르면 안될 거예요.”

수학이 왜 필요한지 나 역시 모르겠다.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이다.

[수학을 배우는 이유는 우리가 전혀 불필요한 일을 하면서 고통받는 것에 대해 인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결과 우리는 회사에서 하등 쓸모없는 일을 하면서도 버틸 수 있는 거다]

아무튼 학원 수업 시간에 졸기만 한 그녀는 역시 대학을 꿈꾸는 김래원이 종합반 대신 영어만 듣는다는 얘기에 놀라서 묻는다.

“너 수학은 어떡하려고? 그냥 찍게?”

김래원의 대답이 날 웃게 했다. “나 수학 잘해. 감방 있을 때 수학 선생이 우리방에 들어와서 할 일도 없고 해서 적분 배웠어.”


* 김래원은 잘 될 것 같지 않다는 내 예상을 깨고 <옥탑방 고양이>로 떴다. 그래서 난 김래원을 볼 때마다 정다빈을 떠올린다. 한달 전 일 때문에 지금 정다빈을 떠올리는 건 슬픈 일이다. 그녀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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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3-12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래원군의 경우 대종상인가 신인남배우상 받을 때 좀 의아했어요...
그는 이미 많은 영화에 출연한 경험이 있는 배우였었는데....
나중에 그 영화제의 기준을 보고...기준이 좀 아니다 싶더라구요,,^^

히피드림~ 2007-03-12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 영화 보고 싶네요.^^

프레이야 2007-03-12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학을 배우는 이유... 제 경우도 그랬나 싶네요.^^
저도 이 영화는 폭력이란 편견으로 안 봤는데 다음에 봐야겠어요.
김해숙의 어머니 연기가 더 기대된다는..

깐따삐야 2007-03-12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내를 위해 수학을 배운다, 그랬었구나...!! 김래원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배우 같아요. '순풍 산부인과'에서 미달이가 좋아하는 래원 오빠로 나왔을 때의 그 이미지가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긴 하지만요. 처음에 장동건이 홍학표와 함께 '우리들의 천국'에 나왔을 때 건물만 훌륭하지, 연기에 대해선 영 시원찮다는 말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한국의 조니 뎁, 이니 어쩌니 하는 찬사까지 나오잖아요. 김래원도 앞으로 무럭무럭 성장해 갈 배우가 아닌가 싶어요.

해적오리 2007-03-12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이 아무리 좋다해도 조폭이 나오는 영화는 못보겠어요..
하지만 수학을 배우는 이유에 대해서는 무지 공감이 가요. 그 때 조금만 더 수학을 열심히 했더라면 나의 인내심이 더 커졌을 거란 아쉬움과 함께...
수학만 잘 하면 제 인생이 달라질거라던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 생각도 나고 그러네요...

마노아 2007-03-12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리뷰는 언제나 즐거워요^^ 영화 너무 신파스럽지 않던가요? 연기는 훌륭했음에도 전 좋아지지 않더라구요. ^^;;

비로그인 2007-03-12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영화 이야기]드림걸즈는 마태우스님의 리뷰 딱 그대로였습니다. 마태우스 님의 리뷰를 읽고도 구태여 봤던 게 후회스러웠어요. 돈보다도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습니다.

무스탕 2007-03-12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안 본 영화네요. 이제 극장에서 보긴 틀렸고 비디오 빌려봐야 겠어요.
수학은... 음... 저는 어학쪽보다는 수학쪽이 좋아서 차라리 수학점수가 좋았었던 기억이..
수학의 용도는 무궁무진한것이고 예측불가능한것이었군요...

미즈행복 2007-03-12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학을 잘하면 인생이 달라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수학에 대한 책을 보니 수학자들이 너무 존경스럽고, 저도 돈 많이 벌면 상금이라도 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마구 들던데요? 저와 같은 심정을 느끼고 싶으시다면 "수학의 밀레니엄 문제들7" 과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를 읽으심이?
그리고 전 김래원이 왜 안뜰까 안타까웠던 차에 "옥탑방 고양이"로 떠서 좋았는데... 요즘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배우는 "공유"

비연 2007-03-12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래원을 보면 정다빈이 떠올라요....정다빈이 있어서 잘 된 드라마였는데...
저도 애도를....잠시.

홍수맘 2007-03-13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학을 배우는 이유에 엄청 공감이 가네요. 저 역시 수학 때문에 대학까지가서도 학점 D를 받았었던 과목 이었거든요. 그리고 저도 이 영화때문에 김래원을 다시 보게된 것 같아요.

마태우스 2007-03-20 0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수맘님/오옷 D라니 정말 수학이 지긋지긋하실 만도 하네요..
비연님/님도 그렇군요...
미즈행복님/페르마의 정리는 다음 기회에 읽어보면 안될까요 제가 아직 수학을 받아들일 마인드가 안되서요...그리고 공유의 연기에는 카리스마가 부족한 것 같아요 저만의 느낌입니다만.
무스탕님/'차라리 수학점수가 좋았다'는 구절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뭐든지 필요없는 지식은 없는 것 같아요...
주드님/님의 결론은 ...저랑 친하게 지내겠다는 거죠?^^
마노아님/아는 게 없으니 어렵게 쓸 수가 없어서요 호홋. 좀 신파스럽긴 합니다^^
해적님/지금도 수학에 필적할 것들은 많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들에서 배우면 되지 않을까요...
깐따삐야님/한국의 조니 뎁이였군요. 전 조니 뎁이 그리도 코믹연기를 잘할지 미처 몰랐답니다^^
배혜경님/배우들의 연기가 다 괜찮았어요. 김해숙 씨야 워낙 잘하시지만요. 폭력보다 다른 것들이 더 기억에 남아요 예컨대 여자애가 노래 부르는 장면...
펑크님/하고싶으신 건 하셔야죠!!^^
메피님/아 그랬나요? 신인상 받았군요...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