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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변신 ㅣ 혜원세계문학 14
프란츠 카프카 지음 / 혜원출판사 / 1991년 10월
평점 :
품절
<반디앤루니스에 올린 서평입니다.>
<절대적인 존재와의 단절, 성>
여기에 나오는 ‘성’은 가까이 있으나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는 존재에 대한 외경심.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모순으로 가득한 곳이다. 후반부에 주인공인 K가 뷔르겔 등으로부터 듣게 되는 ‘성’의 업무처리 방식은 주민들의 믿음과 달리 허술하고, 평범하거나 보통 수준도 안 되지만, 클람에 대한 프리다나 안주인의 경외심, 또는 소르티니에 대한 바르나바스 가정의 태도를 보건데 실제 그곳에서 벌어지는 우스운 일처리에 반해 , 성에 대한 주민들의 믿음은 존경을 넘어 경외에 가깝다. 그리고 서로 다른 대상이긴 하지만 ‘성’과 연관을 맺고 있는 모든 사람은 경외의 대상이 된다.
마을 사람에게 절대적 권위의 대상이지만 비효율적이고, 마을에선 도저히 접근할 수 없으며, 마을과 소통하지도 않는 성. 그런 성의 분위기는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위엄을 가진다. 성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책 뒤의 해설은 성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들을 잘 나열하는데, 먼저 종교적인 입장에서 정리해볼 수 있다. 그의 친구였던 막스 브로트도 신의 심판이나 원죄, 신과의 단절 등을 중심으로 보았다고 한다. 이 해석에 상당부분 동의 하지만 내 생각에 소설에 나타난 ‘성’이 절대적 신앙의 대상인 한편 정작 그 속에 가보면 별거 없는 곳으로 그려지는 걸로 보아, 그 속에 다른 해석들 역시 함께 고려할 수 있다.
중심 이야기를 해설에 따라 생각해보면, 카프카는 친구 브로트에게, 뒷이야기에 대해
‘주인공 K는 계속해서 성과 접촉하려고 애를 쓰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을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마을에 거주하겠다는 K의 요구는 인정되지 않지만, 어떤 부수적인 사정을 고려해서 이 곳 마을에서 생활하고 일하는 것을 조검부로 허락한다.' 라는 성으로부터의 통지가 K가 임종하는 자리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고 한다.
성은 임종하는 순간에서야 어떤 연결 고리가 생기지만, 살아서는 접근할 수 없는 근원적인 권위인 것이다. 그래서 ‘신과의 단절’에 포함할 수 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특정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비판하는 한편, 모순 속에 가려져 있는 다가갈 수 없는 절망을 말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성’이란 공통점을 갖지만, 구체적으로는 ‘클람’이나 ‘소르티니’처럼 다른 대상에 대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K나 주민들은 접근 할 수 없고 접근하려 한 사람들은 모두 상처를 받게 된다.
이렇듯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경외심에 가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 속에서는 일처리 방식도 비효율적이고 권위와는 거리가 먼 이상한 공간이다. 주인공이 아무리 가까이 가려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성의 모습과 역설적인 성의 내부는 다분히 종교성을 갖는다. 사람들의 종교적인 경외심과 실제 성 내부의 모습 사이의 괴리를 통해 종교의 모순을 말하는 한편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종교의 본질을 그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유를 갖고서’, ‘기다리는 모습’은 8장에 나온 K의 생각처럼 ‘가장 무의미하고 절망적인 일’이 된다.
그러나 그 속에 나타난 우스꽝스러운 성의 일처리 방식은 단순히 어떤 권위의 모순보다는 1908년 6월에 그가 일했던, 프라하의 노동자 재해 보험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희화화하진 않았을까? 거기서 그가 본 관료기구의 무자비성과 노동자에 대한 가혹한 처우, 비참한 생활에 대한 비판으로 봐야 할 듯하다. (물론 관료기구도 어찌 보면 경외의 대상일 수 있다.)
프로이트파의 정신 분석학적 입장에서는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근거로 부친에 대한 콤플렉스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장편 <성>을 분석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근원적 대상을 종교가 아니라 아버지로 보는 시각인데, 접근할 수 없는 어떤 권위와 단절된 사람의 절망이라는 공통분모를 생각하면, 수용할 수 있는 해석이다. (여기서도 ‘아버지’만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은 다른 해석들을 참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단절로 인해 성이 받는 괴로움은 전혀 없다. 그리고 성은 성 밖의 모두에게, 심지어 단절된 이들에게 조차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과 연관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사람은 열심을 갖기도 하고, 성과의 단절이 성 밖의 다수를 선동하기도 하며, 종국에는 개인을 파멸시키거나 절망하게도 만든다. 성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과도 관계가 없으며, 그들을 흠모하는 이들과도 관계가 없는
성.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대상으로 인한 대상 바깥사람들의 절망’
<모습과 언어로 인한 단절: 변신>
변신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보다 환상적이어야 하지만 ‘성’처럼 읽기 어려운 작품은 아니다. 다만 그 단절이 너무나 극적이어서 더 유명한지도 모르겠다. 벌레로 변한 인간. 점점 벌레의 모습에 적응해가지만 그레고르 자신은 여전히 인간으로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가 돌아다니는 일 조차도 거부하며,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그가 죽자 가족들은 아무 일 없이 일상을 계속한다. 그리고 경제적 버팀목이었던 그레고르의 빈자리는 다른 가족들이 대신한다. 그리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변신이 비현실적인 환상 문학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성’과 ‘변신’을 왜 묶어놓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단절’이라는 공통분모는 있지만 변신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 중에도 흔히 볼 수 있다. 그것이 ‘변신’이 아니라 ‘질병’이나 ‘사고’ 같은 방법으로 나타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가족 중 한 사람이 언어적으로 단절되고 외모가 변하면 그 사람이 가족 구성원에서 단절되는 건 흔하다. 그리고 처음에는 불쌍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후에는 ‘살아있는 짐’이 된다. (벌레를 선택한 카프카의 선택은 탁월했다.) 그리고 ‘누이의 연주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유일한 오빠’였던 그레고르는 그 연주에 반응하지만, 오히려 냉담하던 손님들 앞에 나왔다는 이유로 다시 쫓겨나 죽음을 맞게 된다.
‘인간’이란 건 언어능력으로 결정될까 아니면 이성으로 결정될까. 그도 아니라면 감성인가? 소설은 죽은 그레고르의 빈자리가 다른 가족들에 의해 아무렇지 않게 채워지는 걸로 끝난다. 카프카가 바라본 현대의 인간에게 나면서부터 갖는 존엄 같은 건 없었다. 단지 그가 수행하는 기능만이 존재하며, 그 기능을 할 수 없을 때가 되면, 결국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른 부품들로 교체된다.
책 자체를 평가하자면 혜원출판사 시리즈는 해설도 좋고 다 좋은데 편집방식은 별로라서 읽기에 조금 어려운 감이 있다. 그리고 이 두 작품에 ‘단절’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조금 다른 성격의 작품이기 때문에 카프카의 성과 변신을 모아놓은 이 책의 구성은 사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뛰어넘어 살아남은 ‘고전들’의 가치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