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로 보는 한국사 2 - 고려편, 교양인을 위한 우리 역사 87가지 이야기
이정란 지음 / 고즈윈 / 200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은 충격적인(?) 고려사 관련 도서가 나와있어 무척 흥미롭게 읽고 있는 중이다. '역사=어렵다'라는 등식을 깨는 도서인지라 더더욱 흥미롭게 읽고 있는 중에, 출간 한지는 몇년이 흘렀지만,  눈에 띄는 좋은 고려 관련 도서가 바로 이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도서의 특징은 역사적인 긁직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기 보다는 고려인들의 삶과 생활에 중점을 두고 엮어간 도서이다. 그렇다보니 우리가 잘 몰랐던 고려인들의 생생한 삶을 만나는 듯한 반가움을 주는 책이다. 우린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데, 고려인들인 당신들은 그렇게 사셨군요...라고 말이다.  

흔히, '역사'하면 커다란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도서를 출간하기 쉽상이다. 고려 때 있었던 대외관계 속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전쟁들을 중심으로 말이다. 박진감있는 내용이며 자극적인 내용인지라 어필하기 수월할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이 도서는 그런 역사적인 획을 긋는 중심 사건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주제는 주는 평범한 일상들과 사회 제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서민적 관점이라고 보면 된다. 과거제도를 시행하면서 생긴 에피소드와 좌주와 문생간의 긴밀한 관계는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더해주고 있다.  

글쟁이들의 모임이었던 죽고칠현과 시회(詩會)는 당시 고려사회의 시대적 상황을 설명하는데 좋은 소재가 되어주고 있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이규보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규보의 모습은 고려의 명문장가이고, 몽골의 칩입을 진정표로 물리쳤으며, 국사책에서도 나오는 동국이상국집을 쓴 장본인으로 알려진 정도이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 그런 이규보의 진정한 인물됨을 잘 알수 있게 해주고 있어 무척 흥미롭다. 한마디로 이규보는 최충헌의 눈도장을 찍기위해 거지 발싸개같은 짖을 서슴치 않았다. 백성들이 주린 배를 욺켜쥐고 죽어갈 때, 그 폐해를 한탄하는 기록을 남긴 인물이었지만 알고보면 백성들의 피고름을 빨아먹은 장본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람은 좀 충격적인 이규보의 모습이었다. 

  현대의 우리 교육 열기는 그 어느 나라보다 더 뜨겁다. 그런데 고려를 살펴보면 최초의 종합 대학이었던 '국자감'은 한 때 그 열기가 대단해 학생의 인원수가 1.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유럽과 비교하면 수백년을 앞서는 우리 최초의 대학이었던 것이다. 물론 사립학교 였던 구재학당은 물론 12도는 고려의 뜨거운 학구열을 대변하는 기록이이다. 3명의 아들을 과거에 합격시킨 어머니께는 녹봉과 봉작이 주어졌다고 하니, 국가적으로도 학구열을 장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대중사회의 모습을 중심으로 서술한 책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생활을 잘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좋은 도서라고 생각한다. 고려의 우리 선조들이 살아온 발자취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축제와 놀이 문화도 잘 소개해주고 있고, 더욱 인상적인 내용은 가족관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에 와서 무너진 고려의 가족관은 남자, 장자 중심 사회였다. 그러나 고려의 사위나 며느리가 대신하고, 외가쪽도 마찬가지였다. 내외를 구별하는 않고 상속및 제사 풍습은 현대인들이 배워야할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게한다. 

고려장이라는 말이 있지만, 실상과 다른 잘못 전해진 내용임을 이 책을 통해 잘 알 수가있다. 종종 잘못 전해지고 내용들을 정확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고려가 조선으로 넘어가기까지의 좋은 사회적 관점의 내용을 담고 있어 친근하면서도 기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을 써준 저자께 감사드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성룡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백성을 정녕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던 서애 유성룔을 만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성룡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유성룡은 나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인물 중 한 분이다. 책의 뒷 표지에 써있는: 위기 돌파 능력, 비전의 제시 능력, 탁월한 국정 수행 능력, 뛰어난 외교력, 유연한 사고, 날카로운 인재 발탁 능력등 저자가 쓴대로 통합의 리더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는 그 보다 더 매력적인 인간적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능력으로 치자면 삼성의 이건희나, 히딩크는 물론 이에 못지 않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측면만이 인간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유성룡은 전쟁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북인 이이첨의 탄핵 상소로 실각하기까지 파란 만장한 국정과 전쟁의 한 가운데에 서있었던 인물이었고, 전란 극복의 첨단에 서 있었지만 후대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훌륭한 인물은 유구한 우리의 역사 속에서 찾아보기 어렵지 않지만 서애 유성룡 선생이야말로 널리 알려져야할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유성룡의 정치인으로서 인물됨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은  어느 당파에 가담하고 있기보다는 당파가 나뉘는 것을 염려하였던 몇 안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또다른 대표적인 분이 율곡 이이선생님이셨다. 

 유성룡과 친분이 있었던 이순신장군 역시 어느 당파에 휩쓸리지 않았지만 유성룡과의 친분 때문에 모진 고초를 여라차례 당하기도 했었다. 당파란 적정 수위를 넘지 않는다면 발전적인 정치 모델로 그 역할을 원활하게 해 나가겠지만, 조선의 당쟁과 같은 상황에서라면 국가의 발전은 뒷전에 두고 정권 장악에 혈안이 되어버리기 일쑤여서 조선의 백성들은 편할 날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유성룡은 국가의 안위를 먼저 염려했고 당파의 화해를 위해 융곡 이이와 함께 노력했다. 그런 유성룡이 깊이 깨우침이 있었던 것은 성리학이기 보다는 오히려 앙명학이었다고 한다. 양명학은 성리학의 가르침과는 달리  

"성인의 마음은 천지만물로 일체를 삼으니 세상의 사람에 대해 내외원근의 구별을 두지않고, 무릇 혈기 있는 것은 모두 형제나 친 자식으로 여기어 그들을 안전하게 하고.... 대인은 천지 만물을 한 몸으로 삼는 자다. 그는 천하를 一家 같이 여긴다. 이는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仁이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라는 놀라운 주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유성룡은 이 가르침에서 귀천의 차별이 없음을 알고, 전란 중에 속오군을 설치하기에 이르른다. 속오군은 양인 뿐만 아니라 천민과 양반까지도 포함하는 군대였다. 양반과 천민이 한 무리에 섞여 재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유성룡의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라를 지키는데 양반 빼고, 천민 빼고나면 지킬자가 몇이나 남겠는가...물론 이는 전시의 특수한 상화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자연스러운 일 같지만 실상은 가히 혁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결과 전란이 끝나고 다수의 천민들이 그 신분에서 벗어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성룡의 발상은 골이 깊었던 조선 성리학 주도 하의 사회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유성룔은 율곡 이이가 건의가 불발로 끝났던 대미수공법의 실천을 강력히 주장했다. 전주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대미수공법을 추진하게된 배경에는 백성들의 생활 안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의 발로였다.  

 유성룡은 이런 생각에 미치자 선조에게 강력한 상소를 올린다. 가히 혁명적인 세제개혁안이라 할 수 있는 대미수공법의 엔진에 시동을 건 것이다. 공납의 폐단은 조선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혀결하려고 나선 인물은 몇 안되었다. 조광조의 개혁드라이브도 실패로 끝난 상황에서 당쟁이 불꽃이 튀는 마당에 백성의 고달픈 인생을 돌볼 마음의 여유를 정치인들은 가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거유 송시열 마저도 대미수공법에 반대를 하고 나섰을까...정말 실망 대실망의 송시열이다.  

유성룡의 강력한 드라이브로 결국 대미수공법은 간신히 실행되게 되었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반발은  거셌다. 장치 일선의 관료들은 물론 각도의 감사들과 고을의 수령들까지 들고일어서 반대를 하였다고하니 어이가 없을 뿐이다... 

그러나 유성룡을 실각시킨 서인들은 유성룡이 힘들여 만들 시스템을 역시 도루묵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얼마나 고독하고 힘들었을까... 백성을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을 나눌 수 있은 그럴 듯한 관료들이 별로 없었으니 말이다.. 

역사는 이토록 훌륭한 선비 유성룡을 조명하려하지 않는다. 최근에서야 징비록과 서애집, 유성룡이라는 이름으로 몇종의 서적이 출간되었다. 그나마 뜻있는 사학자들의 노력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대다수의 주류 사학자들은 자신들의 계통이 아닌 훌륭한 선조들을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렇게 뭍혀져가는 인물들은 이제는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고, 그분들께 감사하며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바라는 마음이 크다... 서애 유성룡께 깊이 감사드린다...

  이 책은 그러한 유성룔선생의 자취를 낫낫이 조명해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기를 탐하고 죽기를 두려워하며 - 조선을 움직인 23인, 그 진실의 기록
윤용철 엮음 / 말글빛냄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역사와 인물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마음에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기를 탐하고 죽기를 두려워하며 - 조선을 움직인 23인, 그 진실의 기록
윤용철 엮음 / 말글빛냄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들어봤음직한 인물들로 책을 구성하였는데, 주로 인물의 졸기와 그에 대한 상소를 근거로 구성하였고 저자의 식견을 첨가한 방식이다. 

조선 세종때 정승으로 이름을 드 높였던 인물 황희에 대한, 어쩌면 역사에 관심이 적었던 분들에게는 새로운 내용이 들어있어 청백리요 기상 드높았던 정승 황희에 대한 환상을 깨트릴 수도 있겠다.  

고불 맹사성은 개인적으로도 지극히 존경하는 인물로, 그 청렴함과 재상으로서의 인품및 능력은 가히 조선의 그어떤 정치인에게 견주어도 단연코 으뜸인 분이다. 진정 선비란 고불 맹사성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뜻밖의 인물은 김상헌이였다. 이 책에는 "정묘호란 때 명나라에 가 구원병을 요청하고 돌아와서는 후금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의 관직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대표적인 척화론자로 추앙받았고 저서에 야인담록등이 있다."고 써있다. 물론 이는 적절한 표현이다. 

 성공해서는 안될 쿠데타라고 생각하는 인조반정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이 안동김씨 김상헌이다. 인조의 쿠데타가 성공을 거두자 김상헌은 이조참의에 발탁되어 청서파의 영수가 된다. 당시 조선은 후금(청)의 침입으로 인조가 남한 산성에 갇힌 상황에서 화친론과 척화론으로 분열한 상황이었다. 화친론의 대표는 최명길이었고, 척화론의 대표는 김상헌이었다.  

당시 상황의 조선은 고려가 거란의 3차 침입 시기와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1019년 거란은 10만 병력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였다. 물론 당시의 거란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고 전투 요원들도 최고 정예였다. 이에 항복을 해야 한다는 주장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주장으로 의견이 분열된 상태였다. 항복하자는 주장에 강력히 반발하며 감감찬 장군은 거란과 싸우기로 결심한다. 그즘 고구려의 군병력은 21만-30만에 가까운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란군이 특수 정예 요원들이라고는 하지만 고려로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강감찬은 거란의 10만 대군 중 2-3천여명 만이 거란으로 돌아가도록하는 완승벽한 승리를 거둔다.  더구나 2차 침입 때의 거란군 40만 병력도 잘 막아내지 않았던가... 

그러나 당시 조선의 상황은 그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왕실은 남한산성으로 도피하여 추운 겨울 날을  힘겹게 지내고 있는 상황이었고,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김훈의 '남한 산성'은 당시의 참상을 잘 묘사해주고 있다. 즉, 척화하여 전쟁으로 겨룬다면 조선은 그야말로 전국토가 쑥대밭이 될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조선은 임진왜란의 처참한 폐허속에서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이 결정적인 약점이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빌게 아닌가. 7년간의 임란은 조선을 완전히 파괴해 버린 전쟁이었으므로 하루 먹고 살기도 힘겨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조선의 정치는 당쟁으로 분열의 분열을 거듭하고 있었고, 실리적인 외교와 정치력으로 조선을 회복시킬 수 있었던 광해를 끌어내리고 올라선 입장인지라 백성들의 지지도 받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국방의 체제는 그야말로 형편없는 상황이었는데다가, 후금이 힘을 쓰면 그대로 쓰러져 버릴 그런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김상헌은 척화를 주장한다. 과연 백성을 살리자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그래 너희는 화친을 주장 하거라. 나는 척화를 주장하여 조선의 자존심은 물론 나의 개인적인 명예를 지키련다." 뭐 이런 생각이 김상헌의 머리를 지배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김상헌은 어차피 화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대세라는 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중에 척화를 주장하는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기회를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는 기회로 활용하고 싶어한 것은 아니었을까... 김상헌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당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을리도 없잖은가... 

덕분에 최명길은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다. 화친을 하자는 신하들은 죄다 역적이요, 척화론자들만이 죄다 충신이던가...이를 김상헌은 교묘히 이용했다는 심증만을 가질 뿐이다. 

  어쨋든 눈물로 항복를 써내려간 최명길의 문서를 찢어버린다. 찢어진 항복문서를 최명길은 다시주워 조각 맞추기를 했다고 김훈은 쓰고있다... 

물론 척화론을 주장한 죄목으로 김상헌은 후금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그야말로 국민적인 영웅이된다. 김상헌은 조선의 기개를 끝까지 지켜낸 선비의 반열에 올라서 있었던 것이다. 시나리오 치고는 좀 멋지지 않은가? 덕분에 김상헌의 이름은 조선에 드높아졌고, 그의 손자 김수항은 할아버지의 명망을 덕분에 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정승에까지 오른다. 

김상헌의 기개는 가상하나, 전국토의 안위와 국민의 목숨을 놓고 척화론을 주장한 것은 상황 파악을 못한 관료이거나 아니면 만용부린 것이라 본다. 어차피 화친하게될 상황이니 나라도 한 번 성질부려보자는 그런 의구심이 들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차라리 거란군이 쳐들어왔을 때 우습게보다가 사로잡힌 강조 장군은 비록 실수로 일을 그르치는 불충을 저질렀지만 끈질긴 회유에도 불구하고 항복하지 않아 결국 참수당하고 만다. 뭐 꼭 죽으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김상헌은 강조 장군과는 전혀 다른 경우 였다. 그래서 강조는 절개를 지킨 것이요, 김상헌은 백성을 위태롭게 했던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김상헌의 작전이 잘 맞아 떨어진건 아닐까... 

물론 화친론자였던 최명길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도 역시 쿠데타의 주역이긴 마찬가지 였으니 말이다. 쿠데타로 이미 일을 그르친 것은 그르친 것이고, 그나마 상황을 파악하고 슬프고 참담하지만 항복문서를 작성하여 삼전도의 굴욕으로 남아있는 우리 역사를 보존케 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김상헌의 등장은 뜻밖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