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 서양의 대표 철학자 38인과 시작하는 철학의 첫걸음
안광복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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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분야의 경험이든 걸음을 내딛는 순간은 한 개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개인의 경험과 환경이 앞으로 나아가는 그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력의 중대함을 말하고자 함이다. 안광복 선생님의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는 그동안 읽어본 책 중에서 개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긍정적으로 끼치게될 최고의 책이라 말하고 싶은 이유도 그와같다. 모든 분야의 접근에는 그에 알맞는 조건과 환경을 전제로한다. 그것이 우연이든 아니든 간에...  

설사 우연으로라도 이 책을 읽게되는 독자들에게는 앞으로 일생동안 철학을 가까이하게 좋은 계기가 되어주리라 믿는다. 철학을 머리아픈 골치꺼리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책을 접하는 순간, 철학은 더이상 골치아프거나 머리를 지근거리게하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 반대로, 철학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고 매우 흥미진진한 생각의 보고임을 깨닫을 가능성이 매우크다. 많은 서양의 철학을 다룬 책들이 고개를 절래흔들도록 하지만 안광복의 이 책은 왜 그토록 철학을 매력덩어리로 변모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서양의 철학자들이 쓴 책을 직접 읽고 싶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저자가 마르크스와 그의 생각을 소개하면서 썼던 바로 그 말, "찰학은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에대한 선입견을 가진 대다수의 독자들에게 스파링이 없이 본게임으로 안내하는 많은 책들은 독자들로하여금 '역시나~' 하는, 선입견을 확인시켜주기 일쑤였다. 그러니 철학관련 서적을 또다시 읽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 듯 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안광복선생님은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한다. 선생님은 공부할 내용에 익숙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분이다. 저자 선생님은 한마디로 어떻게 가르쳐야하는 지를 잘 알고 계신분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양의 철학관련 서적을 이토록 흥미롭게 썼을리가 없다. 이 책의 매력은 인류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유명한 철학자들을 소개했다는 점이 아니다. 우리와는 거리가 너무도 멀게만 느껴지는 그' 철학자' 들에게서 인간적인 냄새를 느낄 수 있도록 저술했다는 점이다. 우리와는 거리가 너무 멀기만한 철인들이 아니라 우리처럼 일생을 살아가면서 그들이 접했던 환경과 경험들을 토대로 철학적 고뇌를 했고 그들의 사고는 자신들이 처했던 환경속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우리와 전혀 다를바가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이러한 철인들의 인간적 냄새는 우리도 철학적인 사고를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그들의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훨씬 더 진보한 독자 개개인적인 사상을 꿈꿀 수 있다는 공감의 근간이 되어준다는 점이다. 철인과의 거리을 아득하기만한 거리감으로 전달했던 기존의 철학서들과 확연한 차이점을 가진 이 책은 그러므로 우리의 옆으로 바짝 다가설수 있다. 우리가 철학으로 다가서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이 우리의 곁으로 바짝 다가서고 있다는 이 느낌...바로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느낌이다.  

때로는 독자로하여금 철인에대한 연민을 느낄수 있게하는 이 책에 대하여 찬사를 과연 그 어떤 말로 대신해야할지 모르겠다. 이 책을 써준 저자께 그저 깊이 감사할 따름이며 이런 인간적인 냄새를 느낄수 있는 철학서들을 계속해서 써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고마움을 대신하련다...  

마지막으로 글을 읽는 머리속에서 맴돌며 내내 떠나지 않는 일관된 생각 두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바로 철학자들의 배경이다. 이는 물론 이 책의 저자가 의도한 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의 배경은 대부분 부유하거나 명문가 출신들이라는 점이다.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탈레스마저도 밀레투스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심지어 대부분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약자의 편에서 철학을 전개시켰던 마르크스마저도 부호의 가문 출신이다. 물론 명문가가 아닌 목사의 아버지를 둔 흄과 성당지기인 아버지와 농부 가문의 어머니를 둔 하이데거를 제외하면 대부분 경제적인 불리함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는 2500년 전의 풀라톤에도 적용이 된다. 플라톤의 가문도 아테네 최고의 정치 명문가였으니 말이다. 서양 사상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 철학의 체계를 완성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도 마케도니아의 어의 출신이다.  아우렐리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논외로 하고라도 귀족의 아버지를 둔 코마스 아퀴나스등 고대에도 철학자들의 배경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야하는지...고대의 탈레스로부터 20세가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의 한사람이라는 가다머에 이르기까지 배경이 탄탄하다. 배경이 이들보다 못한 사람들이 덜 똑똑해서라기보다는 기회가 덜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매우 무겁다. 배경이 두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철학자로서의 뜻을 펴는 날은 과연 오려는가.... 

두번째는 서양 사상가들이 끼친 현대의 자화상이다. 근대의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인류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시대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상이다. 시대의 철학을 바탕으로 사회는 변화하도록 되어있다. 당대의 시대정신이 사회에 고스런히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 시대정신의 배후에는 철학이 빛의 서려있다. 이는 빛의 근원일 것이다. 그 빛이 인간에게 어떤 길로 안내하느냐에 따라 행로가 달라질 수 있다. 현대의 자화상으로 미루어보건데 '서양의 철학은 서구의 사회를 과연 올바른 곳으로 인도했는가?' 라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서구의 사상은 동양의 사회와 아메리카, 즉 모든 지구의 사회에 영향을 끼쳐왔다. 인간의 발길이 닿는 모든 곳에 말이다. 그러나 과연 세계는 서구의 영향 아래에서 행복했는가? 인간 존재의 목적은 행복의 추구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외쳐댔다. 현대의 서구인들은 그 행복을 누구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그들의  행복일까 인간의 행복일까... 

그토록 철학적 사유를 많이해왔던 서구의 사상가들은 현대의 자화상에대한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이는 서구의 철학자들에게 던지고 싶은 처음이자 마지막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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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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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사관으로 본다면 칭기즈칸은 유럽에게 은인이다. 은인의 역사를 지우려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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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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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태조 왕건이 통일을 이루지 약 350년이 지난 즘인 25대 충렬왕(1236 -31) 때부터 공민왕(1330~74)에 이르기까지 약 100여년간 몽골의 속국으로 존재했었다. 그 100여년간 고려가 몽골에게 당한 고통은 이루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미 고려사를 읽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고려를 속국으로 삼아 고려의 정부뿐 아니라 백성들의 삶을 고단하게 했던 몽골인들은 바로 찡기즈칸의 후예들어있다. 만감이 교차하는 이유이다.

몽골은 알렉산더가 지배했던 땅의 8배를, 영국이 세계를 식민지로삼아 약탈을 일삼던 땅의 2배 이상을 지배했던 통이 무척 큰 나라였다. 우리는 흔히 알렉산더를 대왕이라는 호칭을 붙여 부르곤한다. 알렉산더에게 대왕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이 적합한 일이라면 찡기즈칸에 비할 인물은 절대로 아니다. 찡기즈칸이야말로 87개국을 속국으로삼아 그보다 8배의 드넓은 땅에서 각국의 정부를 무릎 꿇이고 지배하며 조공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땅을 넓게 지배했던 인물에게 위대하다는 말을 붙이는 것이 합당한 일이라면 알렉산더는 찡기즈칸 앞에서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초라해보인다. 

러시아라는 국가는 찡기즈칸의 작품이었다. 몽골의 군대가 동유럽과 슬라브족을 하나로 묶어둔 결과가 바로 러시아였기 때문이다. 몽골은 그렇게 러시아도 지배했다. 현재는 독립한 우즈베키스탄에는 몽골의 후예들이 최근까지 통치했었다. 유럽의 대부분 국가에는 몽골의 후예들이 치근까지 지배하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 몽골을 유럽은 두려워했다. 러시아는 그 치욕의 역사를 지워버리고 싶어한다. 

유럽은 몽골의 군대에 치를 떨었다. 몽골의 군대라는 이름만 들어도 싸움을 스스로 포기할정도였다. 찡기즈칸이 이끄는 군대은 패배를 알지 못했다. 87개국의 아시아와 유럽국가들은 찡기즈칸이 이끄는 군대의 말발굽아래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유럽인들이 그 얼마나 몽골인들을 저주하며 인생을 살아갔을까...  유럽인들이 몽골의 역사를 세계사에서 삭제해버린 이유는 바로 그 것이다. 몽골에게 수치스럽게 당했던 과거 자신들의 역사를 숨기고 싶은 마음...그 쪽팔리는 자신들의 과거사를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바로 그것이었다. 

자신들보다 열등하다고 여겼던 황색인종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들의 국가가 초토화되는 장면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무기력함을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그들....그러나 역사는 완전히 지울 수가 없는 일이다. 오히려 서구의 사관으로 바라본다면 찡기즈칸은 유럽국가들에게는 은인과도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마치 신대륙을 그들이 발견했던 것 처럼 몽골의 군대는 신대륙으로 진군했고 온갖 혜택을 그들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럽인들을 무자비하게 죽여 없애고 빼앗으며 잔인하게 약탈을 했지만 말이다...몽골에게 유럽은 신대륙과도 같았고 몽골인들이 유럽에 끼친 영향은 그 온갖 피해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후예들은 몽골의 잔인했던 군대를 기리는 집회 축제라도 매년 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마치 컬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기념하여 축제를 벌이듯이.... 그러나....과연 이러한 서구의 사관은 아메리카에는 적용이 되면서 왜 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참으로 이상한 서구의 사관을 이 책을 통하여 새로이 생각해볼 수 있다. 

고려는 몽골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몽골은 공주를 고려의 왕들과 혼인시켰고 그렇게 사돈간의 관계를 유지해가고 싶어했다. 덕분에 충자로 시작하는 고려의 왕들은 대부분 고려어를 알지 못했다. 어린 시절을 몽고의 왕궁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왕노릇 그만두고 몽골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고려의 왕이 있었을까...그 덕분에 한편으로 고려는 온전할 수 있었다. 

고려의 왕에게 시집온 몽골의 공주는 고려의 왕을 발꿈치의 때로 알기도 했다. 왕을 두들겨 패기도하고 고려 왕의 싸대기도 갈겨댔다. 몽골의 지배를 벗아나기로 결심한 고려의 왕은 공민왕이었다. 친 몽골 세력인 고려의 권문세족인 귀족들을 한꺼번에 불러들여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그렇게 공민왕은 고려가 이성계의 쿠데타로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현재 중국의 속국이 될뻔한 나라를 독립시켰다. 물론 이성계는 중국에게 확실하게 굽히면서 사대하기로 국정의 방향을 바꾸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권문세족에 포함된 한 사람이 바로 김부식과 그 가문이다) 

고려와의 관계속에서 몽골을 바라본다면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지구 역사상 세계를 가장 많이 지배했던 찡기즈칸과 그들의 후예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안에 가득하다. 몽골은 서구 세계의 법체계를 완성해준 인물이지만 철저하게 지워지고 말았다. 최초의 국제법을 만든 이는 바로 찡기즈칸이었던 것이다. 유럽은 로마법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찡기즈칸은 새로이 국제법을 만들어 드넓은 땅을 지배했다.  

몽골을 새롭게 조명하려는 저자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드넓은 땅을 지배한 인물에게 대왕이라는 호칭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에 회의를 느낀다. 진정 위대한 대왕이라는 호칭은 자신의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왕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타국을 지배하고 고통을 주는데 전력을 기울이며 인생을 살다간 한 나라의 군주에게 대왕이라는 호칭은 어림도 없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세종대왕은 정녕 대왕이라는 호칭에 가장 알맞은 유일한 왕일 것이다. 

여하튼, 이 책은 잊혀져가는 몽골의 거칠고도 왕성했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잠들었던 유럽을 그렇게 몽골의 군대가 쳐들어가 칼과 말발굽으로 깨워놓았다고 저자는 말하고있다. 일독은 나름대로 유익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어주리라 믿는다. 비록 제국주의 시대는 아니었으나 유럽의 대부분이 몽골의 식민지였다. 유럽은 그 억울했던 역사를 지우고 싶은 일념뿐이다. 몽골의 역사가 세계사에 등장하는 순간 그들은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일 것이고 그것이 그들은 무척 싫은 것이다. 그리하여 유럽은 세계사를 유럽의 입장에서 재조작하기에 이르른다. 컬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그 중 가장 좋은 예에 불과한 것이다.  

 정말로 아메리카는 컬럼버스에의하여 발견된 역사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곳에는 이미 원주민들의 역사가 최소한 2-4만년 전부터 이어져온 그들만의 역사와 대륙을 가진 주인이었던 것이다. 발견이라니....주인없는 물건을 주웠다는 뜻으로 들리는 그 발견이라는 말은 너무나도 처참한 역사 왜곡의 대표적인 예에 불과한 것이다. 왜 우리가 세계사를 제대로 알아야하고 유럽 중심사를 탈피해야 하는지 느낄 수 있는 좋은 계기다 되어주기에 충분한 책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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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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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감정이 많이 실려 아쉬움을 남기는 책이지만 일독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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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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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 무게감에 비하여 내용은 의외로 읽기 쉬운 편이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신이 있다고 믿어도 좋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만들어졌다고 애써 반박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왜냐면 각자에게는 나름대로의 인생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보고 기독교의 허상을 밝힌다느니 하는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책 한권 읽었다고 바르르 떨 필요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도킨스의 이 저서가 그렇게 훌륭한 저서도 아닐 뿐 아니라 이 저서를 통하여 저자인 도킨스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참작하시기 바란다. 종교의 문제는 매우 이성적이면서도 냉철한 접근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편협된 마인드가 장착된 상태에서는 스스로의 감정에 휘둘리기 마련이다. 저자 도킨스는 이 책에서 뜻밖에도 상당히 흔들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성적이기 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상당히 싣고 있다보니 쓸데없이 책이 두꺼워져버렸다. 책의 두꺼움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다. 두꺼운 만큼 알찬 내용이 많아야하지만 도킨스의 이 책은 그렇지가 못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저자의 감정 실린 내용들을 전달하는데 상당한 에너지를 낭비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종교를 다루어 책을 쓰는 저자로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이다. 특히 이 책을 기독교인들이 읽었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감정이 실린 이 책에서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감정 자극으로 비화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게 될 뿐이다. 이것은 싸우자는 것이지 소통을 하자는 태도는 아닌 것이다.   

저자가 본문에서 인용하는 미국의 대통령 제퍼슨의 일화와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이 성경을 읽는 적이 없다는 식의 서술 방식은 저자의 감정이 실린 예가 되겠다. 특히 벤저민 프랭클린은 "등대가 교회보다 더 유용하다." 혹은 불가지론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서술한 방식, "신이 있을 가능성은 이빨 요정이 있을 가능성과 같다."와 같은 표현은 너무나 자극적인 표현들이다. 자제 햇어야 하는 문구들인 것이다.

이전 점에서 저자의 '만들어진 신'에서 몇 몇 장은 출간전에 삭제했어도 좋다는 생각마저 든다. 저자 도킨스의 이름은 국내의 많은 독자들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이기적 유전자' '눈먼 시계공'등은 도킨스라는 이름을 한국인독자들에게 각인시킨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 그가 '만들어진 신'에서는 약간 이성적인 중심을 잃고 감정에 치우친 느낌이다. 이성적인 접근 보다는 감성적인 접근으로 마무리한 장들이 보인다.  

이러한 관점은 결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독자를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끌어주기 보다는 함께 감정적인 접근을 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런 점에서 차라리 성서적인 접근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저자의 욕심이 지나쳐 좋은 책의 질을 떨어트렸다.  

물론 이 책이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저자가 스스로 책의 질을 저하시킨 요인들에대한 아쉬움에서 하는 말이다. 이 책은 신에 대한 접근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는데 충분히 도움이 된다. 종교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종교에 관심을 가지다보니 읽게되었는데 나름대로 유익한 점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새롭고 신선한 내용들로 책을 구성해간 것은 아니다. 여러가지 이론들을 자신의 견해를 뒷바침하는데 적절하게 사용했고 상당히 설득력을 가진 정도의 책이다.  

독자들은 그러나 이 책 하나로 성급한 결론에 도달해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한다. 좀더 많은 관련 서적들을 통하여 독자들 스스로의 마인드를 구성해가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사실상 끝이나지 않는 성격을 가진 분야이다. 종교가 가지는 특성은 거의 맹목적이며 맹신적인 측면이 강하다. 애초에 의문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태의 종교인들에게 이성을 호소해봐야 소용이 없다. 도킨스는 물론 종교인들에게 이 책을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종교인들과 싸우자는 것일 뿐...도킨스 자신이 경험하고 관찰하며 연구해온 모든 것들을 바탕으로 책을 저술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성이 많이 들어간 책임을 반박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정성이 많이 들어간 만큼 일독의 가치는 매우 높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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