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의 필법이 매우 특이하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다. 저자가 쓴 '남한산성'도 이 책 '칼의 노래'와 같은 필법인데, 두 책이 모두 무엇인가를 한 단계 높여 보려는 의도가 짖게 배어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문학의 질적 수준 향상에 그 목적을 두고 쓴 글이라면 나름대로 성공한 경우라 할만하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저자와 같은 스타일로 소설을 쓴 사람을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소설 문학의 한 장르를 개척했다고 나는 평가하고 싶다.  

저자의 필법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1) 새로운 소설의 서체를 독특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2) 주인공의 심리적인 묘사를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표현해 내고 있다 

3) 작품은 소설이지만 저자가 마치 한 편의 시를 쓰고 있다 

4) 전개의 과정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이 모두는 새로운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요즘들어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 나로서는 새롭게 느꼈고, 흥미를 자극하는 서체였다. 위에서 느낀 점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1) 새로운 소설의 서체를 독특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이 느낌은 마치 작가가 새로운 화파의 선구자적인 존재라는 느낌을 받는다. 이점은 대단히 고무적이며 작가의 시도에 찬사를 보내마지 않는다. 그러나 화파는 그 선구자로 하여금 그 화파를 더더욱 발전해 가게하지만, 소설에서는 김훈의 서체를 따라가는 이는 영원히 아류로 남을 것만 같다. 즉, 김훈 고유의 영역에서 멈춰서는 한계를 가지는 것에 그치지는 않을지... 그것이 소설계의 생리가 될수도 있지 않을까...

 2) 주인공의 심리적인 묘사를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표현해 내고 있다 : 이 점은 김훈만의 서체가 주는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묘사해내는 상황들에서 나는 시간이 잠시 정지한 듯한 착각을 느끼곤했다. 이 느낌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숨소리는 물론 그 눈동자의 움직임까지도 전해주는 특성이 있었다. 더불어 이는 때로 지루하다는 느낌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이 점을 작가는 극복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소설이 가지는 장점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소설 분야에서는 꽝인지라 판단이 서질 않는다...

3) 작품은 소설이지만 저자가 마치 한 편의 시를 쓰고 있다 : 한 편의 시를 쓰는 듯한 느낌은 그 장면에 대한 세밀한 작업이라고 본다. 작가는 현미경으로 관찰 대상을 바라보고 그 관찰 내용을 매우 세심하게 독자에게 읽어주고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의 이런 방법은 소설이 주는 변화와 속도감을 배제한 방식인지라 장점이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듯 하다. 여하튼 매우 독특한 서체라는 점은 분명하다.

4) 전개의 과정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 작가가 전개의 과정에 신경쓰지 않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이 책이 역사 소설이라서 그런가 보다 하는 생각을 들게한다. 저자의 책을 읽은 것은 남한산성과 칼의 노래 딱 두 가지 뿐인데, 역사를 자신의 이야기로 풀어 서술하는데 전개 과정이 저자에게는 따로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역사적 시간의 흐름이 곧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구의 대상으로서 그 충분한 가치를 지닌 작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위의 독후감은 오직 이 책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을 읽은 후의 느낌일 뿐이다. 이런 느낌이라면 차라리 최근 완역된 '난중 일기'를 읽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순신 장군께서 직접 쓴 글이니 그 심정과 정황을 그 얼마나 잘 전달하고 있겠는가...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저자는 독특한 자기만의 영역을 그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은 시보다는 길이가 매우 긴 작품이다. 길기 때문에 독자를 매우 오랜 시간동안 즉, 작품을 읽는 내내 독자를 이끌고 가야한다는 의무감과 부담감이 공존하는 분야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서 전해주는 특이점들은 그 영역이 저자의 한계가 될지, 아니면 저자의 완성된 서체로 그 독자적인 영역을 빛나게  할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섣불리 판단 하기에는 분명 아직 이르니까...  

 결론적으로는 매우 궁금증을 아자내는 작가이고 작품이다. 현재 작가가 지켜가고 있는 소설의 이러한 특징들을 작가는 계속 지켜갈 것인가. 아니면 끝내는 이러한 틀을 깨어 버릴 것인가... 기존의 틀 속에서 새로운 스피드를 장착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일까...아마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긴박감과 속도감은 현미경적인 묘사 때문에 떨어지는 요소는 아니라고 본다. 독자와의 유대감을 유지하면서도 빠르게 전개해나가는 소설만의 특징들...분명히 그 방법이 있을 것이다...    

어쨋든 저자는 신중한 작가이고 자신이 새로낸 길로 가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그런 점에서 별점을 4개 주고 싶다... 적어도 과거 새로운 화파의 거장들이 당대에 제대로 인정받은 적은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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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3대 논쟁
이재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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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자를 구별 하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매우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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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3대 논쟁
이재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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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역사에 관한 서적들의 내용이 때로 진실이 아닌 경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승자는 언제나 역사의 주체가되어 역사를 쓰고 때로는 고치기를 서슴치 않았기 때문이다. 선조실록을 기록한 시대는 북인들이 집권하던 시기였고, 수정 선조실록을 기록한 때는 인조 반정으로 집권에 성공한 서인들의 작품이다. 물론 선조실록의 부실함을 수정 보완한다는 명분으로 손을 댄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의도는 서인들의 입맛에 맞는 실록을 개작하자는 데 더 큰 의의가 있었던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맥락에서 가능한 경우라면 역사를 분명히 정리할 필요성이 있다는 데 동의한다.  

이 도서는 그런 맥락에서 3가지를 논쟁의 핵심으로 삼고 있으며 명쾌한 사료와 근거를 제공함으로서 머리를 밁게 해주는 도서이다.  3가지 논쟁 중 2가지만 언급하자면....

  

1) 율곡 이이와 십만 양병설 

 이 책의 3대 논쟁 중 하나인 율곡 이이의 '십만 양병설'에 대한 진위 여부이다. 사실, 교과서에서는 율곡선생님께서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며 장차 있을 화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저자는 이 쟁점에 대해여 독자에게 아주 세밀한 자료로 논거의 기틀을 바련해주고 있다. 물론 율곡의 십만 양병설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 책은 이 책 외에도 찾아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주된 논의의 대상이되지 못하고 지나가는 정도로 밝혀둔 정도인 것은, 내용의 흐름을 지나가는 한 지류에 불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조선시대 3대 논쟁사'는 테마를 '십만 양병설'로 잡고 있기 때문에 두서있고 논리적인 저자의 논거를 일목 요연하게 읽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십만 양병설이 왜 조작되었으며, 그 과정과 의도는 어떤 것이었는지 이해하는데 아주 충분한 근거와 사료및 정황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한가지 는 사육신에 관한 것이다.  

 단종의 복위를 꿈꾸다 발각되어 죽음으로 뜻을 굽히지 않은 6인의 절개 드 높은 뜻을 기려 노량진에 사육신을 모셔놓았다. 이 곳에 가면 사육신 외에 허묘이기는  하지만 한분이 더 모셔져 있다. 이 책은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잘 밝혀주고 있으며 역시 사육신으로 결정되어 묘역에 모셔지기 까지의 과정도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사육신에 대한 재고의 여지를 주장하는 글로부터 시작하여 조직 위원회가 결성되어 결국 한 분을 더 사육신의 묘역에 추대하는 과정을 밝혀두고 있다. 물론 어떤 경우 그렇게 추후에 따로이 추대된 사실을 모르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를 알고나면, 가히 우리 나라의 역사를 짊어지고 온 역사학자들에 대한 생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읽고 배우는 역사책은 제대로 된 사관을 가진 역사가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점을 부인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읽고 있는 많은 역사책은 그렇지 못한 역사가로 부터 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한국인으로서 그 실망감은 허탈함을 넘어 배신감까지 느낄 수도 있는 부분이라고 본다.  

 종언하자면, 우리의 역사를 바로된 역사로 읽을 수 있으려면, 즉, 어느 역사가가 바른 역사를 쓰는 사람이고, 어느 역사가가 실제로는 바르지 않은 역사를 쓰고 있는지 구별하면서 책을 읽으려면 이재호선생께서 쓴 이 책은 크게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역사에 대한 진실외에도 그 구별력에 도움을 준 저자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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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베토벤 :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레너드 번스타인 (Leonard Bernstein) 지휘, 크리스티안 짐머만 (Krysti / DG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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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조화의 탄력성은 협연의 정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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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베토벤 :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레너드 번스타인 (Leonard Bernstein) 지휘, 크리스티안 짐머만 (Krysti / DG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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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는 아마도 대한국민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곡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더불어 이 곡을 연주한 음악가들도 참 많다. 하여 다수의 음반을 소장하고 있는 애호가들이 즐비한 곡이라 짐작해본다. 

 이곡은 베토벤의 박진감을 1악장에서 잘 살려냈고, 누가 뭐래도 2악장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황홀한 곡이 아닐 수 없다. 베토벤을 흔히 괴팍한 음악가라고들 하지만 이곡의 2악장을 듣는 사람이라면 그런 편견은 바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폴리니와 칼뵘의 합작 혹은 미켈란젤리와 줄리니의 연주등은 빼놓을 수 없는 명연으로 애호가들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오르내리는 곡들이다.  물론 치메르만과 번스타인의 연주도 많은 애호가들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특히 이 연주 즉, 치메르만과 번스타인의 연주를 좋아한다.  

협주곡은 그야말로 협주곡인 것이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가 Boss냐 아니면 협연자가 Boss냐를 따진다면 협연의 조화로움은 깨어질 것이고, 연주는 들으나 마나일 것이다. 말그대로 협주곡은 지휘자와 협연자가 서로 적절한 공조를 이루어 내야만 좋은 결과물을 내어놓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번스타인과 치메르만의 협연은 협주곡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치메르만의 영롱한 건반은 마치 청명한 밤 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지듯  듣는 이의 가슴을 한 점씩 두드려낸다. 치메르만의 손가락이 건반을 두드릴 때, 마치 나의 가슴속에 있는 건반을 아름답게 수놓는 듯하다. 이어 번스타인은 치메르만의 피아노를 조화롭고 완벽하게 채워 넣는 느낌이며, 그 조화로움은 어느 음반에도 느낄 수 없는 조화의 탄력성을 전해준다. 그들의 탄력성은 다른 음반과 비교해 볼 기회가 있다면 확연히 구별해 낼 수 있을 정도도 두드러진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번스타인과 치메르만이 황제에서 보여주는 조화로움의 탄력성은 이토록 아름다운 협연이 또 어디에 있을까 하는 감동을 준다. 사실, 그들이 들려주는 하모니를 달리 표현 할 언어가 없다고 느낄 때가 많다.     

최고의 음반으로 사랑받고 있는 폴리니와 칼 뵘의 연주, 영롱한 타건으로 폴리니의 연주를 빼놓을 수 없다고 본다. 칼 뵙과의 협연에서 역시 폴리는 그 또랑 또랑한 타건으로 애호가를 사로잡는다. 물론 폴리니의 피아니즘을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그러나 치메르만과 번스타인의 조화로운 탄성을 느끼기에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피아노 협주곡이므로 피아노를 중심으로 보아도 무방하겠지만 분명 협주곡에서는 협주도 피아노를 돋보이도록 하여야하며 피아노의 공백을 완벽하게 채워넣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협연으로 폴리니와 칼뵙의 연주가 매우 뛰어난 것은 대부분 수긍할 것이다.. 호불호의 문제일 수 있겠지만 호불호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치메르만과 번스타인....나에게는 최고의 연주인 것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조화로움의 극치가 주는 지극한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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