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식민사관 -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만권당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아래의 글들을 보니 이덕일 선생의 책을 기다리는 분들이 계신 모양입니다.
김현구 선생께서 제소하면서 위 책에 가처분 신청을 했더랬습니다. 최근 2심에서 승소했다고 하니 좀더 기다려 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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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양측의 의견 대립이 극에 다다르다 못해 송사에 이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바로 국내의 사학자들인 원고 김현구선생과 피고 이덕일 선생의 이야기다.

 

 

피고 이덕일 선생은 김현구 선생이 저술한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를 읽고 일본 극우파의 역사관과 다르지 않다고 판단,「우리 안의 식민사관」이라는 자신의 저술을 통해 김현구 선생을 일제식민사학자라며 날카롭게 비판했다고 한다.

 

김현구 선생은 법에 의지했다. 1심 담당 판사는 이덕일 선생이 김현구 선생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고 그 죄질이 나쁘다하여 이덕일 선생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고 한다. 이는 지난 2월에 있었던 일이다. 피고 측은, 이는 학문을 죽이는 처사라 하여 항소했고 바로 오늘 2심의 결과가 나왔다. 무죄였다.

 

 

 

 

1심 재판부의 견해: "피고인은 피해자가 주장하지도 않은 허위사실을 전제로 피해자를 식민사학자로 규정했다. 피고인의 학력과 경력 등을 보면 피해자가 임나일본부설을 아무 비판 없이 수용하지 않았음을 충분히 알았을 것", 고로 유죄,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2심 재판부의 견해: "책 머리말을 보면 피고인은 한국 사회가 식민사관을 극복하지 못해 큰 해악을 초래하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려면 식민사관 카르텔을 비판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이 타당한지는 차치하고 주요 동기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고로 무죄

 

 

 

이를 개인적으로 초유의 사태라 칭하는 것은 소송의 본질이 우리 역사에 관한 것이며 학자들 간의 견해 차이가 소송에 이르렀기에 하는 말이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일개 독자에 불과하지만 나로서는 심각한 상황 전개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양 당사자의 책을 읽어보지 않았으면 말을 말어~! 라고 할 수도 있겠다.

 

 

피고 학자가 원고 학자에게 어떤 식으로 무지막지한 욕을 어떻게 했는지는 쟁점이 된 책을 아직 읽어보지 않았으니 알 길은 없다 (이덕일 선생의 저술은 품절이라고 한다. 아마 소송중이라 일시 판매가 중지되지 않았을까 생각할 뿐). 딴에는 오죽했으면 학자가 학자를 상대로 법에 의존하기로 결정했을까 싶기도 하다. (두 책은 읽어볼 예정이다)

 

다른 한 편으로 매우 우려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 소송에서 피고를 실형에 처하며 사건을 종료시킬 경우, 필연적으로 국내 모든 학자들의 학문 활동을 심각하게 구속하는 새로운 법이 될 수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판례는 모든 학계를 줄 소송의 대열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 원피고가 떠날 날이 없는 학계를 상상해보시라. 한 판사가 결정하는 판례의 위엄이 그 얼마나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던가. '분묘기지권'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사정이 이러할 경우, 연구 결과물에 기인한 학문적 대립이라기 보다는 감정 대립으로 변질되어 어느 학자의 발언이든 여차하면 소송감이 될 여지가 다분하다. 각 분야에서 연구에 매진하여야 할 학자들이 피고가 되어 소송을 준비하거나 심리를 받으러 법원으로 출퇴근하는 사태는, 말 그대로 초유의 사태인 것이다.이러한 분위기는 학자들에게 학자 본연의 성질을 거세하는 형벌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소송 무서워서 어디 입이나 뻥끗할 수 있으랴... 인문 학계의 소송은 기타의 소송과 판이하게 다른 성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논쟁이 핵심 원료인 인문 학계에 찬물을 끼얹을 뻔 한 송사를 그간 심히 우려하는 마음으로 지켜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학계에서 의견 대립이라는 알맹이를 빠트린다면 과연 학문의 성장이 가능키나 한 일일까. 감옥에 가기로 작정하지 않은 다음 에야 그 어느 학자가 다른 학자의 논리에 반박을 해줄 것인가. 학문은 상호 반론을 자양분으로 더 크게 자라나는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독보적인 해석 혹은 독보적인 저술이란 자신이 아닌 타자들이 인정할 때 학자가 얻을 수 있는 지고한 업적이 된다. 사마천이 그러한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어찌 보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상반된 해석과 주장은 사학의 본질 일 수가 있고 견해가 각기 다른 데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을 것이다. 해석의 차이가 꼭 사학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닐 것이지만 말이다. 다양한 사료와 고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해석 차이가 어찌 꼭 같아야 한단 말인가. 

 

사학자 각자의 해석에 따라 다른 프리즘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기에 말 그대로 <사관>이라 하는 것이다. 학자의 펜 끝은 전장에 나아가는 전사의 검 만큼이나 날을 잘 세워야한다. 무딘 검으로는 전장에 나아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죽기로 작정하고 전장에 나아갔던  백제의 결사대도 자신들의 칼 날은 시퍼렇게 갈았을 것이다. 하여 학자는 자신의 검을 벼리고 또 벼려 날카롭게 하지 않을 수 없고, 상대의 그 것 또한 못지 않게 날이 잘 서 있을 것이라는 점도 각오를 해야한다. 날이 서지 않은 검은 검이 아니다. 그리하여 예리하게 날 선 두 검이 서로 마주할 때 불꽃이 튀어 오르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무사가 상대방의 검이 너무 날서있다고 비난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사학자에게 주어진 유일한 검은 바로 연구의 결과이며 그에 따른 사관이다.

 

또한 누군가가 자신의 학문에 이의를 제기할 때 그 이의를 압도할 수 있는 더 깊고도 탄탄한 학문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진정 빛나는 학자의 길이라 믿는 바이다. 상대가 있기에 나의 학문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던가.. 이는 학계가 건강하다는 방증이라 믿는 바이다.

 

건강을 잃으면 사람이나 학문이나 매한가지로 병이 드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치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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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루비콘 강을 건넌 후,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고 말했다고들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는 당시 그가 분명 건강했다는 이야기다. 체력이 빌빌해가지고서야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니 말이다. 결단력 있게도 루비콘 강을 건너던 그 나이는 대략 50세 정도였다.

 

 

그러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 강을 건너던 나이도 되지 않아 나는 엉뚱한 ‘아케론’을 건너고 있었다. 사공 카론에게는 금화 한 닢을 주어야 노를 저어준다고 한다. 나는 ‘레테’에 다다를 즈음에 엽전을 주겠노라 구라를 치고는 배에 올랐던 것이다(내게 금화가 있을 리가 있나..). 그런 줄 알고 노를 젓던 카론은 내게 금화가 없는 줄을 눈치 챘던지 뱃머리를 돌려 나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금화 없이는 어림도 없다면서 말이다 (죽더라도 최소 엽전 한 푼은 있어야 한다니...). 이 이야기는 수년 전, ‘레테’를 목전에 두고 있던 나 스스로의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요즘 온 나라에 퍼져있는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이 소개하고 있는, 직접 큰 효험을 본 냥반들이 주장하는 고지방 식단에 대한 찬사는 실로 대단했다. 마음껏 동물성 지방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고기를 맘껏 먹고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니 오죽이나 좋겠는가. 그럴 수밖에, 그 정도로 효과가 좋다면 나라도 그러겠다 진짜.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매체는 고지방 식단에 대한 우려를 전문가 집단을 통해 내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대번에 체험자들로부터 즉각적인 반응이 되돌아온다. 요즘 쌀값이 현저히 떨어지니 쌀 소비가 줄어드는 현실을 우려하여 탄수화물의 섭취를 권장하느라 고지방식단을 헐뜯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어느 쪽 이야기가 진실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자도 전문가도 아니다. 고지방 식단으로 효험을 본 낭반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팩트를 전하는 것이고, 전문가들은 또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견해를 피력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다만, “안 해봤으면 말을 말어~!”, 혹은 “니들이 게 맛을 알어?” 라고 외치던 어느 아제들이 잠시 떠올랐다 사라진다.

 

 

레테를 건너기 직전에 뱃머리를 돌렸던 나로서는 건강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카론을 기쁘게 해줄 금화도 한 닢도 마련해야하고 말이다. 하여 이런 저런 서적들을 뒤지고 뒤지느라 그렇게 몇 년이 흘러 버렸다. 건강 관련 지식을 몇 년 뒤져 읽는다고 깨달을 바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렴풋이 건강한 신체를 위해 해야 할 기본적인 사항들을 약간 알 수 있었다.

 

 

요즘 트렌드인 고지방 식단이 그 중 하나이다. 참고 서적들을 활용한 나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강에 관심이 있는 대다수 사람들도 알고 있듯이, 동물성 지방을 소화시키는 핵심은 담즙이라고 한다. 「간담」이 기타 장기보다 더 크고 튼튼한 분들은 이 동물성 단백질 식단이 상당히 유리하다. 쉽게 말해 고기를 잡숫자마자, 충분한 량의 담즙 산을 바로바로, 팍팍 쏴드리기 때문이다. 배불리 잡숴도 고지방을 분해하고 소화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더우기 간담이 좋으신 분들에게는 동물성 단백질이 기운도 훨씬 더 나게 해준다. 이게 죄다 가장 많은 량의 담즙을 아낌없이 쏘아줄 수 있는 능력 덕분이다. 간담이 탁월한 분들의 홍복이 아닐 수 없다. 간담이 크니 흔한 말로 간이 배 밖으로 나오는 것은 일도 아니고, 담대하기로는 말로 다할 수가 없는 분들이다. 이런 분들은 얼마든지 고기를 즐기셔도 좋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렇게 간담이 좋으신 분들은 고기를 잡술 때, 채소를 많이 곁들이는 것은 되려 도움이 되지 않다. 「내경內徑」과「동의보감」에 ‘산수신산酸收辛散’ 이라는 말이 있다. ‘신 맛은 거두어들이고 매운 맛은 발산시킨다’(흩어지게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무엇을 거두어들이고 무엇을 발산시키느냐 하면, 바로 살이다. 채소가 신 맛을 가진 것은 아니나 채소는 간기능을 향상시킨다. 간은 산(酸) 기운을 장(藏)하고 있는 장기(臟器)이다. 그러므로 채소를 많이 잡술수록 간 기능이 더욱 강해지게 된다. 간 기능이 가뜩이나 좋은 냥반들 몸 안에서 채소는 간 자체에 산기운을 더욱 증강시킨다. 몸 내부를 순환하도록 되어있는 기(氣) 흐름, 즉 오행 불균형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체중이 당연히 늘어날 수밖에 없다. 강해진 간이 그야말로 원치 않는 살을 하염없이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흔히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는 분들이 계시다. 요즘은 공기만 마셔도 살이 찐다고들 할 정도로 체중 증가가 염려되시는 분들도 계시다. 이런 분들은 결코 채식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분들로서, 간기능이 가장 강한 상태로 태어나신 분들이거나 평소 간을 강하게 하는 음식을 많이 잡숫는 분들일 가능성이 높다하겠다.

 

 

간담이 가장 강한 분들이 가진 또 다른 특징은 폐기능이 가장 약하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운동회 때 달리기 꼴찌를 도맡는 분들로 폐기능을 강화시키는 음식을 드시면서 반드시 운동을 겸해야 하는 분들이다. 특히 간이 좋은 분들은 땀을 많이 흘려주어야 몸이 가볍고 상쾌한 기분으로 일을 할 수가 있다. 비위가 가장 약한 분들은 땀을 많이 흘리는 것이 되려 좋은 기운을 상하게 하는 이치와 반대인 경우이다. 운동은 만인 건강 필수조건이지만 말이다.

 

반대로 비위가 약한 분들은 동물성 고지방을 소화시킬 수 있는 담즙이 적다. 다른 장기에 비해 비위가 가장 약한 분들은 간담의 기능도 상대적으로 약한 편에 속한다. 지방이 풍부한 삼겹살을 다량 섭취할 경우 소화가 잘 안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이런 분들은 건강 상태가 약할 때에 고기를 굽는 냄새만 맡아도 속이 미식거리거나 식욕이 저하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러므로 비위가 가장 약한 분들이 많은 량의 고지방 식단을 지속할 경우 병을 불러 오는 수가 있다는 점도 아울러 밝혀두고 싶다.  

 

사실, 우리는 계절에 나는 음식을 골고루 먹어주면서 운동을 적당량 해주는 것이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랄 수 있다. 음식 불균형은 분명 신체 기운 불균형을 초래하게 마련이다. 소신을 가지고 골고루 잡숫고 운동하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더라고 강력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이지 싶다. 아, 음식은 가능하면 따듯하게 잡숫기를 또 강력 권해드리고 싶다. 몸이 차가워지면 병기가 침범하기 좋은 조건이니 말이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주절대려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레테를 목전에 두고 되돌아왔던 이의 관심사라 여겨주시고 양해해주시기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첨언 1:

조사 「-의」자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어느 분께서 부단히 주장하시는 덕분에 일리가 있다 여겨 시도해 본 것이다. 그러나 쓰다보면 「-의」자가 나도 모르게 자동으로 들어가곤 했다. 다시 글을 고치곤 했다. 더불어 어쩔 수 없이「-의」자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음을 알겠다. 또한 그분은 한자어를 순수한 우리말로 사용하는 것의 아름다움도 꾸준히 주장하신다. 이 점은 「-의」자를 사용하지 않는 것 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언어는 수용성이 있으며 늘 가변적이다. 친숙함이란 정말로 판단을 매우 흐리게 함도 알겠다.

 

 

첨언 2 :

이 글을 읽는 지인의 지적이 있었고,

동물성 단백질과 동물성 고지방을 일괄처리하는 오류를 범했음을 인정하여 필요 부분을 수정하면서 더불어 약소한 첨가를 병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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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의 서재 글에 대한 독자의 반응 란에는 “좋아요”라는 항목이 있다. 흔히 찬(贊)이 있으면 반(反)이 있기 마련으로 ‘싫어요’가 있을 법도 한데, 알라딘의 항목에는 ‘찬’은 있으되 ‘반’은 없는 경우이다. ‘찬’이 있다고 꼭 ‘반’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찬’을 하지 않은 나머지는 저절로 ‘반’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꼭 그런 것은 아니어서 침묵은 경우에 따라 ‘찬’으로도 ‘반’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고 중립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찬’과 ‘반’을 함께 묻는 경우와 ‘찬’만 있고 ‘반’이 없는 경우는 결코 같은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전자는 양 극단 중 어느 하나를 반드시 도출해내야 하는 경우에 사용하는 방법일 것이다. 반면 후자는 ‘반’할 줄을 몰라서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요긴하다.

 

이는 알라딘이 잘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알라딘의 알라디너에 대한 배려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일상에서는 항상 상대에 대한 배려를 앞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직격(直擊)은 불가피한 전쟁에서나 사용하는 극단적인 방법이라고 여기는 이유이다. 직격하는 글은 흔히 상대방에게 직접적이고 깊은 심적 내상을 주거나 정도가 심하면 사람을 해치기 때문이다. 이는 언론을 통해 종종 접하는 비극적인 경우이다. 명분을 가진 내용의 글이 방법상의 문제로 그 누군가에게 불면의 밤을 선사한다면 이것은 정녕 글쓴이가 원하는 바는 아닐 것이라 여기는 바이다. 그러하기에 불가피한 전쟁에서나 사용하는 것이 직격인 것이다.

 

 

묵공은 어떻게 보면 전쟁의 달인이었다. 그의 전쟁 솜씨만 놓고 보면 얼마든지 병가(兵家)라 할만하다. 그러나 묵가(墨家)를 병가(兵家)라 하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묵공은 직격(直擊)을 우선으로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불기피한 상황에서 만이 직격을 이용했다. 그의 사유는 겸애(兼愛)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유가는 묵공의 겸애를 인의를 모르는 처사라고 비난했지만 나는 묵공의 가르침을 공경한다.

 

목적이 정당하다하여 모든 방법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녕 뜻을 이루려 하는 사람이라면 바르고 정당하며 가급적 다수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작 핵심은 직격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려는데 있는 것이니 말이다. 명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이 무기탄하다면 누군가의 말처럼 방법론에서 자신만의 쾌감을 느끼는 것에 그치고 마는 수가 있다. 어떤 이는 이런 경우를 두고 분노의 배설이라고도 했다. 좋은 명분을 가지고 시작했으나 마치 욕구를 배설하는 느낌을 주어서는 원하는 바를 얻기가 어렵기에 하는 말이다.제 아무리 명분이 있다고 하나 매사에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원합의체’란 공산당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니 말이다. 공산당이 아닌 이상 안건에 다수의 동의를 얻고자 힘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중국의 한 대(漢代)에 내가 좋아하라는 음양가의 학설로 경학을 이해하려는 경학자들에 불만을 품고, 다른 종류의 경학에 시동을 걸었던 학파가 있었다. 이를 ‘고학’ 즉 ‘고문학파의 경학’이라 한다. 이들은 음양가를 괴이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라 칭했고 유흠이라는 학자가 제창했다고 한다. 이 중 대표적인 인물이 양웅(楊雄)과 왕충(王充)이라는 냥반들이다.

 

(주역에 접근하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양웅과 왕충의 접근법을 공부한다면 주역을 훨씬 더 풍성하게 접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 양웅이라는 냥반은 중국철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혁명가로 간주되는 인물이다.  또 내가 좋아하는 노자(老子)를 ‘인의를 배격하고 예절과 학문을 멸절한다’하여 노자를 멀리했다. 또한 장자와 양주를 평하기를 ‘제멋대로이고 법도가 없다’ 고 하였고, 또 내가 겁나 겁나 사모하고 있는 묵자와 안영(晏子)을 ‘예를 폐기했다’고 했다. 신불해와 한비는 ‘험악하고 교화를 무시했다’ 고 평했다. 신불해와 한비는 개인적으로 친근한 인물들이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으나, 위에서 언급한 노장과 양주 그리고 묵자와 안자등은 양웅의 견해에 사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양웅이 남긴 말씀 중 옳거니 하는 금쪽같은 말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書不經非書 서불경비서

言不經 非言 언불경 비언

言書不經 多多贅矣 언서불경 다다췌의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글이 경에 부합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요

말이 경에 부합하지 않으면 말이 아니다

말과 글이 부합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아도 군더더기이다

 

 

이 말을 다시 의역해본다면,

 

글을 다스리지 않으면 글이 아니요

말을 다스리지 않으면 말이 아니다

말과 글을 다스리지 않으면 제 아무리 많다 하더라고 해로운 것이다.

 

췌(贅)라는 말은 ‘쓸모없다’ 거나 ‘불필요하다’ 또는 ‘군더더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풍우란은 한 발 더 나아가 췌(贅)라는 말을 ‘해롭다’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풍우란의 해석에 적극 동감하는 바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간혹 마주하는 직격하는 모습의 글을 보면서 뜻을 이루기에 더 가깝고, 거칠기 보다는 세련미와 더불어 배려를 갖춘 글을 기대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제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퇴근을 했을 것이다. 중추가 내일 모레이니 말이다. 즐거워야할 중추에 증후군이라는 접미어가 뒤따르는 요즘이다. 때로는 한 가정을 위태롭게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중추인 듯하다. 알라디너분들께서는 부디 즐거운 중추를 맞이하여 서로 반갑고 고마운 중추가 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부디, 몸은 힘이 드시더라도 마음은 즐거운 추석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토록 노래를 잘 부르는 오연준님,

아직 치아도 다 갈지 않은 나이 같은데, 어찌 이리도 노래를 잘 무른단 말이오??

그대의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가 찌든 내 마음의 때를 올올이 벗겨주는 듯 하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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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모,

그러니까  Jean philippe Rameau 라는 냥반은 프랑스 태생으로 베토벤의 선배님 되시는 냥반이다.

독학으로 화성의 기초를 연구, 확립했다고 한다. 하여튼 이 하나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일은 해낸 것인데,

정말 흥미로운 음악도 작곡을 했다.

 

수입] Philippe Herreweghe (Rameau : Les Indes Galantes)(Digipack)
Philippe Herreweghe / Harmonia Mundi / 2000년 6월

 

(다양한 버전으로 감상하는 것이 고전음악의 매력이지만

사적으로는 딱 이음반을 소장하고 있고 이것으로 끝이다)

 

대표적인 곡이 바로  Les Sauvages 라는 곡이다. 글자 그래도 옮기면 야만인 혹은 미개인이다.

곡의 이름을 이렇게 붙인 의도가 무엇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서구인의 시각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저토록 아름다운 춤을 추는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미개하다 생각한 모양이다.

 

나중에 라모는 이 미개인 혹은 야만인이라는 제목의 음악을 재활용하여

프랑스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Les Indes galantes 라는 예술을 만들에 낸다.

당대 고전 음악에서야 솔직히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 밀리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 싶은데....

 

어째거나 라모는

음악의 제목인 '야만인' 혹은 '미개인'을 갑자기 '우아한'으로 탈바꿈하는 대 이변을 연출해낸다.

더더욱 놀리운 일은 '우아한'이라는 말 뒤에 붙은 '인도'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음악의 제목이 야만인에서 위대한 인도의 제국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개다가 아메리카의 원주민을 의미하던 음악이 인.도.로 말이다.. ㅠ.ㅠ.

많이 헷갈린다 정말

 

이쯤하면 라모가 처음 붙인 제목인  Les Sauvages을 자연인 으로 번역하는 것은 어떨까..

인간이지만 정녕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모습에 감동한 작곡가 라모 말이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에 영감을 얻어 곡을 쓴 라모를 상상하게 된다. 

 

또 어째거나 프랑스 내 라모의 인지도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지만

한국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이지 싶다

불구하고 꾸준히 음반이 들어오고 있는 것을 보면 결코 음악사에서 홀대할 인물이 아님에 틀림이 없다.

  

다음의 영상에서 보듯이 원주민들이 춤을 추는 장면을 재연했다.

 

 

1) 약간 느린 버전

 

 

 

 

2) 음반과 거의 비슷한 속도의 영상물

 

 

또 어째거나 무더운 여름을 잠시 잊게 해줄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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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8 09: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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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3 23: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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