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7첩 반상 - 인류 최고 스승 7명이 말하는 삶의 맛
성소은 지음 / 판미동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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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가 많지 않음에도 내게 읽어나가기가 수월한 책은 아니었고, 또한 책이 도착하도 전에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도마복음과 동경대전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도마복음과 동경대전, 두 경전은 내게 낮선 것들이었다. 성경은 접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나 진지하게 읽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고, 동경대전은 부끄럽게도 관련 도서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여 이번 기회에 관련 도서를 구입해 함께 읽었다.

 

이 책을 읽는 방법으로 내게 두 가지의 선택이 가능했다. 하나는 본 책을 먼저 읽은 후 초면의 도마복음과 동경대전을 따로이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을 접하기 전에 이 두 내용을 먼저 읽어보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후자를 선택하기로 하고, 먼저 「도마복음」을 읽었다. 이어서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신복룡, 선인」을 구입해 「경전 7첩 반상」과 함께 읽었고 아직 끝내지 못했다. 

 

책을 받아 펼치니 추천사가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저자는 기독교에서 시작하여 불교에 다가갔고, 나아가 또다른 경전들을 접했다. 이 모두가 자신의 서재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몸소 체험을 통한 것이라 한다. 따듯한 안방의 아랫목에서 글을 썼다 한들 독자인 내가 알게 무엇이고, 설사 안다 한들 어떠하리.., 그러나 저자는 머리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접했다고 한다.

 

추천사를 지나면 프롤로그를 만나게 된다. 나는 이런 프롤로그는 처음 읽어보았다. 내 독서의 바닥을 훤히 드러나 보이게 하는,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글이 담겨있었다. 예리한 날이 가슴을 파고들듯 아프게, 그리고 다시 아름답게 다가온 대목은 다음과 같다.

 

‘인문은 고통과 위기에서 피어난 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혼란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창조의 원동력이 아닌가. 지금 나의 삶이 위태롭고 아프다면 여태껏 잊고 살았던 ‘나’ 라고 하는 꽃망울이 터져 나오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1쪽

 

나는 이토록 가슴을 울리는 프롤로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더불어 나의 독서가 그 얼마나 빈약한 것이었단 말인가... 경전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만 저자의 정신에 경도되고 말았다.

 

7가지의 경전은 하나로 통한다, 바로 깨달음이다. 마치 자신을 낮춘 물이 흘러 큰 바다, 한 곳에 이르듯 말이다. 다만 그 표현이 다를 뿐이다. 깨달음이야말로 경전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 하여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것. 이 자유는 방종과는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자유이다. 기독교에서의 깨들음은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요, 불교에서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요가와 도덕경 역시 그러하다. 나를 아는 것이다. 탐욕과 욕망을 버리는 것, 나의 집착과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자유로움이다. 하여 우주에 닿는 것이다. 다만 각각의 경전들은 깨달음으로 가는 안내를 위해 각기 다른 방편을 사용했을 뿐이다.

 

인간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은 인간은 깨달음이 필요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지구상에 유일하게 깨달음이 있어야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인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만이 필요이상으로 욕망하고 탐욕 한다. 필요이상의 욕망과 탐욕은 나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존재에게 유해하다. 그 다른 존재가, 다른 사람 다른 사회 그리고 다른 동물이든 식물이든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모든 환경이든 말이다. 우리 사회가 늘 불균형으로 인해 아프고 병들어가는 이유이다.

 

'스스로 그러함’은 아무런 조건 없이, 그리고 아낌없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인간에게 내어준다. ‘스스로 그러함’은 본디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그러함’을 깨닫지 못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貪瞋癡)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탐진치’는 그칠 줄 모르는 탐욕, 끝없이 욕망하는 그 어리석음, 그 탐욕을 이루지 못할 때 오는 노여움이다. 한마디로 탐(貪)은 ‘스스로 그러함’의 대척점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말이다.

 

깨달음은 나 자신에게는 물론 나 이외의, 우리 환경을 포함한 모든 존재에게 도움이 된다. 중용(中庸)의 표현을 빌자면, 만물을 생육하는(萬物育焉-만물육언) 존재가 되는 상태가 아닐까.

 

경전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도마복음이었다. 기독교의 경전으로 평소 알고 있던 기독교의 내용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러한 편견은 기독교의 정신을 몰라도 너무나 몰랐던 나로 인한 것이었다. 하긴, 성경이 집에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으니 말이다. 도마복음은 우리에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31쪽, 도마복음

진정한 자아를 아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며, 자아와 신성은 동일하다.

24쪽, 도마복음

 

내게 도마복음의 가난이란, 탐을 버린 가난으로 이해된다.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세상을 굶는 것’이다. 저자의 이 말은 인간의 탐욕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의 의미로 파악된다. 저자의 말대로 하늘나라는 공(空), 비어있는 곳이니 말이다. 탐을 버린 가난은 정신의 풍요를 뜻하며 깨달음으로 가는 방편임을 예수께서는 알려주시지 않았던가... 번뇌를 끊어내는 금강경의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대목이다. 또한 우파니샤드는, “매일 덜어내며 가는 매 순간의 완성”이라고 가르치고, 도덕경은 “하루하루 없애간다”고 말한다. 도마복음의 가난이란 물질적 빈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유교의 가르침과 정신의 풍요로움, 깨달음으로 가는 상통하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매우 인상적인 또다른 부분은 ‘자아와 신성은 동일하다’고 말하는 도마복음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말이다 싶은데, 그 말은 ‘네가 곧 부처니라’ 였다. 기독교의 경전이나 불교의 경전은 서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성이 우리 안에 있으니 깨달으면 곧 우리는 부처가 된다. 도마복음은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있다’ 라고. 도마복음은 그 씨앗의 싹이 트도록 해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고, 싹이 트는 순간 우리의 자아는 신성과 동일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신성을 가지게 되다니... 내게는 충격적인 도마복음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기독교와 불교는 거리가 너무나 먼, 결코 가까이 할 수 없는 영원한 상극의 그 어떤 것으로 인식해왔던 것은 크나큰 나의 편견이었음을 또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바가바드 기타는 말한다,

요가’라는 말은 신에게 닿는 것 178쪽

인간의 본성인 아트만과 우주의 브라만은 하나 179쪽

 

동경대전은 말한다,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

사인여천(思人如天), 사람을 하늘님처럼 섬기라 209쪽

 

경전들은 인간이 도달 불가능한 그 무엇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두툼한 껍질을 벗어내고 맨 발로 걸어야 할 그 길을 안내하고 있다. 바로 깨달음이다. 당신은 나보다 더 행복하겠지만 나도 작지만 행복하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로 가는 길이 이곳에 있다. 행복은 권리하고 말한다던지 추구의 대상이라고 말하기에는 왠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마치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행복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알고보면 행복은 본디 나의 것, 스스로 가지고 태어난 인간의 것인데 말이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었던 것을 잃어버린 후 오래도록 그것을 되찾지 못했다. 스스로의 깨달음은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바가바드 기타는 말한다.

 

경전들은 한입처럼 말한다. 인간 안에 신성이 있고, 네가 곧 부처이고,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이고, 사람이 곧 하늘이다 라고. 이 모두는 우리에게 한결같은 목소리로 깨달음을 전언하고 있다.

 

누군가는 말했다. 인간은 무지개를 보면 닿아보고 싶어 하고. 지평선을 보면 가보고 싶어진다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말했다. 인간은 맨 손을 쥐고 있어도 펴보고 싶어 한다고. 이는 인간의 본능이며 창조력의 원천이라고.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 탐욕의 원천이기도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 책은 경전의 의미를 전하며 그동안 가지고 있던 나의 편견을 산산이 깨트려준다. 그동안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문자와 사유(철학)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은 틀렸다. 문자가 있고 사유가 있다 한들 동물보다 못한 짖을 해온 것이 인류의 역사였다. 이 책을 읽은 지금은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경전이 있고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라고. 인간은 경전을 존중해왔지만 동시에 늘 경전을 배반해왔다.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은 모두 같은 말이다. 원수마저 사랑하라 했지만 우리는 그 원수를 지독하게도 미워했다. 인지상정이라지만 이것은 깨달음이 없을 때의 이야기다.

 

믿음을 종교라 말한다면 모든 믿음은 종교랄 수 있다. 유일신과 그 교리만을 종교라 한다면 유불도는 종교라 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유대와 기독교는 종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고자 본질은 종교에 관해서가 아니다. 종교를 초월하는, 스스로 그러한 인간의 자아로의 회귀이다. 흔히 말하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 경전들을 옭아매기에는 그 말씀이 너무나도 크고 위대하다. 그동안 갇혀있던 경전의 울타리를 걷어낼 때가 아닌가 한다. 우리가 자주 듣던 말, ‘진리’라는 말이 있다.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그 진리로 가는 방편을 안내하는, 일종의 작은 깨달음을 주는 더없이 귀한 진리의 책이 되어줄 것이다. 이제 이곳에서 한 발 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경전의 세계로 뛰어들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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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판에서 새로이 살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40쪽, 아래 5줄, “더 큰 나라를 일구는 일깨움의...”에서 ‘나라를’은 ‘나를’의 오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문맥상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2. 저자는 본 책에서 다석 류영모를 6회 이상 언급하고 있다. 29쪽과 115쪽에서는 유영모, 104, 114, 115, 125 쪽에서는 류영모라고 쓰고 있다 (115쪽 상단에 류영모, 하단에 유영모 두 번 등장함). 누군가가 다석께서는 자신의 성을 ‘유’가 아닌 ‘류’로 불리기를 원했다고 말해준 적이 있다. 어째 거나 독자로서는 ‘유’이든 ‘류’이든 하나로 통일해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책은 출판사가 서평 희망자에게  제공해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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