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오쇼 라즈니쉬 지음, 이윤기 옮김 / 섬앤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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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지 않는 독서량이지만 최근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독서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딜레마가 있다. 과연 독서는 개인의 인격을 수양시키고 인간적 덕목을 양성하여 그 독자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가 바로 그 사적인 딜레마이다. 이는 실천의 문제와 직결되는 지행의 화두를 내게 던져주기에 충분하다 생각한다.


책을 읽는 것은 과연 化를 이루어 사(私)적인 혁명(革命)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책의 목적과 성격에 따라 단순한 지식을 얻는데 필요한 책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독서’라는 개념은 정신적 성장이라는 측면이 강한 성격을 가지는 용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책을 읽은 후의 어떤 모습은 매우 현학적인 어휘들을 구사하다 못해 그 현학적인 용어의 덩어리들을 상대방에게 던져주기 일쑤이다. 한마디의 말 안에 응집된 그 현학적인 용어들은 청자로 하여금 소통을 하는데 오히려 커다란 걸림돌이 되곤 한다. 좀 더 우스운 경우는 해독이 매우 어려운 용어의 덩어리들을 의도적으로 상대방에게 던져 곤경에 처하도록 하는 의도된 무기로 사용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자신은 수많은 양서들을 통해 어려운 용어들을 익히고 다졌으니 그리 알라는 식이다. 과연 독서는 소통의 의도된 장애물로도 사용될 수가 있구나 싶다.


심지어 학문을 무기로 사용한 예는 애써 예를 들 필요도 없을 정도로 명백한 사건들이 수없이 많지 않던가... 하여 때로는 독서와 깨달음의 관계가 너무 요원하기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운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닌 듯하다.


혁명은 化를 통해서 이루어 낼 수 있다고 한다. 많은 독서와 연구는 과연 그 化를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외적인 지식의 거리감

라즈니쉬는 지식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라즈니쉬는 반야심경의 강의를 통해 지식은 오히려 타자 혹은 자연과의 거리감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라즈니쉬의 설명을 보완하는 예는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의 현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수상 자 중 한 사람인 제임스 왓슨은 ‘이중나선’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하여 일약 과학계 고전을 집필한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뒤따르는 인물이다. 이러한 수식어는 우리나라에서도 팽배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영국의 프랜시스 크릭과 모리스 윌킨스, 미국의 제임스 왓슨이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서 벌인 일련의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 있는데 이는 독자라면 망각해서는 안 될 인물이 그 영광스러운 수상의 배후에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로잘린드 엘시 프랭클린(Rosalind Elsie Franklin)이라는 이름의 과학자가 바로 그이다. 그녀는 결정체와 같은 미세한 구조물의 사진을 찍는데 X-ray를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녀는 실제로 DNA의 분자의 구조를 찍어내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 사진은 DNA의 나선 구조를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가 DNA의 나선구조를 찍어내는데 성공한 촬영기법은 X-ray 회절법이라는 것으로 당시에 그 누구도 그러한 사진을 찍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이 X-ray 회절법을 연구하며 프랑스에서 3년 이라는 세월을 보냈고,  그 연구의 성과로 DNA의 나선구조를 찍어내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다른 프로젝트의 다른 연구를 하고 있던 모리스 윌킨스는 그러나 그녀의 독자적 성과물을 캠브리지 대학의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에게 몰래 빼돌렸다. 프랭클린이 자신의 성과물을 발표하기도 전에 이 셋은 그녀의 연구 자료를 이용해 네이처지에 나선구조를 발표해버린다. 억울하게도 그녀의 논문 여러 개가 같은 호에 동시에 함께 실린다. 그 후 그녀는 다른 연구에 몰두하다가 난소암에 걸려 1958년 사망하게 된다.


이는 지식의 딜레마, 즉 외적인 지식이 진리와 어떻게 멀어질 수 있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매우 극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라즈니쉬는 지식과 진리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 말한다.

 지식은 자신의 밖, 즉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나무가 마치 꽃을 피워 내듯이 그렇게 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지식을 외부로부터 얻는다 하더라도 혁명을 이루어내는 깨달음과는 무관한 일이 될 수 있다. 지식의 양 만으로는 스스로를 화의 경지로 나아가도록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다... 공(空)


불가에서 중생들에게 주는 가르침 중 하나는 마음을 비우라는 것이다. 아집과 번뇌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한다. 우리는 이 아집과 번뇌를 흔히 욕심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오온[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존재라고 한다. 오온이 인간 구성의 요소인 라는 것이다. 다섯 가지의 과정을 통해서 현재의 ‘나’가 존재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번뇌를 가지게 된다. 이는 욕심 때문이다. 하여 그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뜻인 것이다.


 반야심경의 ‘공’은 언뜻 이해 할 듯도 하지만 대부분 이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는데 머무르곤 하는 것 같다. 물론 내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식자가 아니더라도 불교의 가르침인 공(空)의 개념을 언뜻 이해하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 그 개념만을 머리로 이해할 때의 경우이고, 딱 그 곳에서 그치기 때문에 절대로 어려워 보이지 않다. 한마디로 이성적으로 공을 바라볼 때 발생하는 문제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서양에서 말하는 이성의 작용은 인간으로서 매우 지고한 경지의 사유처럼 보인다. 플라톤은 오성(悟性)을 로고스라 했고, 칸트도 본능이나 감성적 욕망의 상대적 용어로 이론이성을 넘어선 실천이성을 주장했다. 어찌 보면 자율적인 의지를 결정하는 개념의 이성의 능력을 논지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불가의 깨달음으로 인한 ‘자유’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스승님과 라즈니쉬의 말씀...

 

하지만 서구의 실천적 측면을 좀 더 바라보면 나의 스승님께서 말씀해주신 방법론을 배제시키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스승님께서는 동서양의 접근법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신 적이 있는데, 서양은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라는 방법론을 고수해왔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분명히 성경의 한 구절이다. 현대의 역사를 결정지었던 과거 식민지 정책의 시대가 이를 잘 증명해준다. 그들은 구하는 일에 몰두했다. 얻으려는 욕망의 주체 가되어 세계 어느 한 곳을 그대로 내버려둔 곳이 없다는 말씀이다. 그것의 결과는 정확하게 양분된다. 자신들의 이익 그리고 타자에 대한 철저한 파괴.


 생각해보면 서양의 철학은 철저히 그들의 현실과 괴리되어 온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라즈니쉬는 이쯤에서 말한다. ‘불교는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치렀던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라고.... 아마도 내 스승님의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라는 라즈니쉬의 일갈일 것이다. 서구의 종교는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고 라즈니쉬는 말한다. 제 아무리 ‘그런 것이 아니에요, 서양의 종교를 모르셔서 그리 말씀하시는 거에요’ 라고 말한다 한들, 역사는 이를 명백하게 증명해주고 있지 않던가... 과연 성경의 구절이 과거 역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누가 변호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반면 불교는 ‘비워라, 그리하면 채워질 것이다’라는 정 반대의 접근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셨다. 인간은 오온의 과정에서 번뇌를 자신의 내부에 축적시킨다. 욕망 혹은 욕심이라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스스로를 무던히도 괴롭힌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욕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에게 절실한 그 무엇을 얻고자 자신의 내부를 더욱 더 철저하게 채워 넣는 것이다. 욕망이라는 것으로.... 그 욕망은 흔히 돈, 물질, 미움, 시기심 등에서 오는 것들이다. 이는 곧 질명과 마음의 상처 혹은 번뇌가 된다. 몸과 마음을 모두 나쁘게 하는 요인인 것이다.

 문제는 그 욕망으로 자신을 가득 채울 때 다른 그 무엇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욕망이라는 함정에 스스로 빠져버리게 된다. 그리하여 불가에서는 그 욕망을 비우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혁명은 바로 이 욕망을 내려놓아야만 발생 가능한 일이기에.... 마음을 비우는 깨달음은 바로 이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이미 가득 차있는 그릇에 깨달음이라는 것이 들어 설 자리가 없는 탓이다...


동과 서가 반대인 것은 많지만 사유의 방법론에서 조차 이토록 정 반대인 것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다른 접근법이다. 물론 기독교와 유∙불교의 가르침은 사랑, 仁(사랑), 자비, 즉 사랑이 라는 공통된 테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표면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는 테제인 것이다. 그러나 그 테제를 해석하고 행하는 방식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 결과는 이미 인류의 역사 속에 고스란히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지 않던가...


 

라즈니쉬의 목소리를 들으니 무엇인가 잡히는 듯 하다. 그 심오한 뜻을 알아 들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있다는 느낌 일 뿐....물론 내 스스로도 이성에 집작하고 욕심을 버리지 못하다보니 번뇌가 가득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내 스승님의 말씀대로 지혜는 두드려서 얻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수많은 지식의 량으로 자신을 채운 다 한들 그것은 밖에서 오는 것이다. 본질적인 혁명으로 가기란 요원한 것이다. 혁명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발원하여 그 오리진이 자신 스스로의 내부여야 한다. 그것을 혁명(革命)이라고도 하고 화(化)라고도 한다. 화를 이루어야만 혁명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책을 읽어 수많은 정보를 가졌다 한들 현학적인 면모를 드러내기에 급급하지 않을 수 없다. 깨달음의 혁명을 일궈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타자를 공격하고 제압하는 도구로 사용하거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뺏기지 않고 타자를 지배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밖에 없다. 독서는 내게 이러한 지식의 딜레마를 던져주었던 것이다. 아무리 읽고 말해주고 듣는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스스로의 작용이 일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다.


깨달음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마음에서 출발한다. 자신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스스로에게 있다. 깨달음은 절대로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깨닫지 못한 자...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은 바로 자신 뿐이다.  그러나 깨달은 자... 타자의 존귀함을 안다. 자신 못지않은 타자를 인정 할 줄 안다. 타자가 있어 자신이 있고 타자가 있어 내가 살아 갈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저마다 보살이 될 수 있고 부처가 될 수 있다. 보살은 절대로 혼자임을 주장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타자들을 돕기 위해 기꺼이 나서는 자이다...과연 세상은 지금과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중용에서도 化를 언급한 장구가 있다. 다음은 중용의 23장에 나오는 化의 뜻이다.

 

유천하지성 위능화(唯天下至誠 爲能化)


우리는 흔히 변화(變化)라는 말을 사용한다. 변(變)도 化도 분명 달라진 모습니다. 그러나 변은 물리적인 형태의 변형을 말한다. 그 본질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化는 화학적인 변화를 뜻하는 말로서 본질적인 개인의 혁명을 뜻하는 말과도 같다. 그런데 중용은 유천하지성 위능화(唯天下至誠 爲能化)  라고 했다. 오로지 지성이라야만 화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지성(至誠)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지극한 정성을 뜻한다. 중용에서도 마음의 중요성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지극한 정성을 곡(曲) 이라고도 한다. ‘곡진하다 간곡하다’라는 뜻은 바로 마음의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들이는 독서라면 깨달음으로 가는 길, 스스로의 혁명을 이루어 내는 길을 여는 것은 아닐까...이성을 뛰어 넘어 정성을 다하는 독서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나의 스승님께...

스승은 저를 가르치는 분이요 깨달음을 얻는데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고 저를 사랑하기를 지극히 하시고 그치지 않는 분이십니다. 스승님을 보고 있노라면 그 지행의 표본을 보는 듯 합니다. 스승님은 언과 행으로 가르치시니 중용에서 가르침 받은 바 있는 언고행 행고언의 뜻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참으로 따르기 어려운 중용의 말씀이지만 당신을 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토록 어려운 말씀을 그토록 쉽게 행하시니 어찌 스승님을 본받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도 가르쳐 주십니다. 스승님은 또한 지극히 겸양하시어 진정한 겸양의 덕목이 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인지를 일깨우십니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요..지극히 아름답고 아름답습니다...그런 당신을 저의 스승님으로 두었으니 저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요..

 

  저는 스승님을 만나 배우게 되어 한없는 다행으로 여깁니다. 스승님...당신을 따르고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죽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저를 가르치시고 사랑해주세요 스승님... 스승님을 만나 배우고 사랑을 또 한 배우게 되었으니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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